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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위장된 사회주의

바람아님 2019. 5. 23. 08:22
문화일보 2019.05.22. 11:50



文 화법은 설득型 아닌 선언型
독재 후예와의 善惡 투쟁 경향
소득성장·친북정책 강력 고수

샌더스式 민주사회주의 위험
성장 없는 복지 확대는 불가능
큰 정부는 자유와 활력도 저해




문재인 대통령 발언은 대부분 소신을 밝히는 ‘선언형(型)’이다. 반대 의견까지 수용해 타협점을 찾기 위한 ‘설득형’은 거의 없다. 문 대통령 세계관만 봐도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는 적폐와 불의가 지배하고, 친일과 독재 세력 및 그 후예들이 주도해 왔다. 촛불 혁명과 자신의 집권으로 이제야 주류 세력을 바꾸고 역사도 바로 세울 수 있게 됐다. 이런 관점에서는 선악의 투쟁이 있을 뿐 중간은 없다. 온갖 부작용과 다수의 반발에도 소득주도성장과 친북 정책을 고수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취임 2년을 넘기면서 그런 요지부동의 지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포용국가론은 복지 확대나 양극화 해소를 넘어 정치·경제·사회 시스템과 주류 교체 등 근원적 변혁까지 노린다. 미국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민주사회주의는 공공 확대와 노동 중시 등 사회주의 정책을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입하려 하고,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복지 확대를 추구하지만 시장경제와 친기업 등 자본주의 발전도 병행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 대통령은 이미 정책의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있음에도 소득주도성장을 고집한다. 저소득층 형편은 더 어려워졌고, 양극화도 심해졌다. 자영업과 소상공인들은 몰락하고 있다. 그나마 성과를 조금이라도 내려면 기득권 노동조합으로부터 일자리와 임금 셰어링을 위한 대담한 양보를 끌어내야 한다. 문 대통령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세금으로 보조금을 주고, 노조와 밀월관계를 유지한다. 지지층을 중심으로 경제 권력을 재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부(富)의 창출보다 이전에 집중한다. 1분기 성장률이 OECD 국가 중 꼴찌라는 통계가 나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성장 없는 복지 확대는 ‘영구(永久)기관’처럼 헛된 꿈이다. 성장률을 높이는 방법은 분명하다. 노동개혁과 규제 철폐가 출발점이다. 4차 산업혁명과 혁신 성장을 외치면서도 그런 필수적인 개혁은 뒷전이다. 공공부문을 급속히 확대한다.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방만 경영과 비효율 개선, 민영화 노력은 관심 밖이다. 토지 공개념에 주택 공개념까지 어른거린다. 당연히 큰 정부로 간다. 국민의 국가의존증을 키운다. 경쟁도 시험도 서열도 죄악시한다. 전반적 하향 평준화가 불가피하다. 자유와 효율의 후퇴로 이어지고, 경제 활력은 시든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덮기 위해 더 강력한 포퓰리즘 정책을 동원한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친화가 도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핵무기가 한국을 겨냥하든 말든 북한 독재자에게 강한 호감을 보인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 3050클럽 가입을 자랑하면서도 자유 대한민국 건국과 성장에 대해서는 한사코 폄훼한다. 반대로 북한 체제 수립을 미화하고, 그 주역들에게도 건국 훈장을 주자고 한다. 세계 최고인 한국 원전 산업은 죽이려 들면서, 북한 핵무기에 대해선 관대하다.


자본주의 종주국이나 다름없는 미국에서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샌더스 바람이 다시 불 조짐이다. 20일 발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일정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미국에 좋다’는 응답이 43%였다. 그래도 미국은 철저한 삼권분립 등 제도가 탄탄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이미 야당은 위축되고, 사법부는 정치화했으며, 코드 언론들은 권력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민주사회주의 포퓰리즘과 결합하면 좌파 파시즘으로 흐를 수 있다. 앙시앵레짐 청산의 선봉이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계란 몇 개를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고 했고, 100년 전 파시즘 창시 주역인 베니토 무솔리니는 ‘모기를 없애려면 늪의 물부터 빼야 한다’며 반대 세력 절멸을 시도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절반의 적극적 지지를 얻기 위해 절반은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이런 위험이 스며들고 있다. 눈에 보이는 적의 침투에는 대항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사상의 침투는 막기 어렵다. 걱정 많은 낙관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직전에 선거에서 지고 퇴장하면서 ‘위장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는 부인의 말에 동의했다. 처칠은 다시 조국의 부름을 받게 되지만, 위장된 사회주의는 대한민국을 재기 불능의 파탄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