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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티 테이블] 석양도 아름답습니다

바람아님 2019. 6. 16. 09:28


국민일보 2019.06.15. 04:03

 

인생은 오래 살고 오래 익을수록 아름다워.. 남은 생은 길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떠나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 있지만 영원하지 않다. 인간의 삶뿐 아니라 한때는 찬란하게 빛났으나 세월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도 있다. 메신저의 총아였던 빨간 우체통과 공중전화도 이용률 저조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동네 철물점과 라디오 수리점, 솜틀집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백열등, 타자기, 필름 카메라, 자동차 클러치 페달 등은 추억의 단어에 가깝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열렬하게 필요했던 것들이다.


소극장들도 사라지고 있다. 2002년 목욕탕으로 쓰던 3층 건물을 개보수해 개관한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도 폐관작 ‘딸에게 보내는 편지’만을 남겨 놓고 있다. 17년간 실험적인 공연을 선보였던 ‘정미소’가 경영난으로 대중 곁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극장을 운영해온 배우 윤석화가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름다운 석양처럼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 것이 회자되고 있다. 그는 “석양, 아름답잖아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도 아름답지만, 석양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퇴장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곳을 향한 출발이란 의미인 듯하다.


우린 곁에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모른 채 살고 있다. 세월이 지난 후 발견한 편지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깨닫는 것처럼 인생은 덧없이 흘러간다. 안톤 슈 낙(1892~1973)의 수필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한 대목이다.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으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100세 시대 누구나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오래 살수록 인생은 과연 더 아름다워지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


행복의 비결은 특별함보다 평범함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영화가 있다. 지난해 말 개봉했던 일본 다큐영화 ‘인생 후르츠’는 마치 과일이 익어가듯 오래 살수록 삶의 ‘맛’이 들어가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90세 건축가 할아버지 ‘쓰바타 슈이치’와 87세의 못하는 게 없는 슈퍼 할머니 ‘쓰바타 히데코’ 부부는 50년간 살아온 15평 단층집에서 과일 70종과 채소 50종을 키우며 살아간다. 봄무 딸기 무화과 토란 옥수수 유자 앵두 매실 밤 감…. 계절이 바뀌면 꽃이 잘 보이게 식탁 방향을 바꾸고, 건강한 제철 먹거리를 정성껏 요리한다. 2014년 5월 첫 촬영을 시작으로, 2년간 쓰바타 부부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았다. 그야말로 소소한 일상을 담은 다큐는 일본에서 무려 1년간이나 상영이 될 정도로 관객들의 응원을 받았다. 이유는 천천히 차근차근 빚어낸 인생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내레이션이다. 영화 주제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밭일 후 오수를 즐기다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다큐멘터리 촬영 중이었다. 죽음도 하나의 일상처럼 보였다. “이제 90세라 나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요” “살아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라며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할아버지의 태도를 보며 ‘오래 살수록 인생은 더 아름다워지는 거야’ ‘오래 익을수록 인생은 맛있는 거야’라는 이야기에 수긍할 수 있었다. 일출도 멋지지만, 일몰의 순간도 멋있다.


우린 살아가면서 인생의 여러 가지 모양의 문을 만난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어떤 문들은 다시 돌아올 희망을 안고 조금 열어둔 채 떠난다. 어떤 문은 “더는 안 돼”하며 닫히기도 한다. 그때마다 낙담하기도 하지만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다시 떠나야 한다. 미국의 영적 지도자 리처드 로어는 ‘위쪽으로 떨어지다’에서 전반부 인생의 임무는 출발하는 문을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준비운동일 뿐 아직 완전한 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로운 전망과 가능성을 찾아 떠나야 한다. 남겨진 인생이 더 길다. 천천히 차근차근 찬란한 석양을 준비해야 한다.


이지현 종교2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