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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칼럼] '징비록'을 다시 읽으며/[고두현의 문화살롱] '징비록' 우리보다 더 탐독한 日

바람아님 2019. 7. 13. 08:59

[윤평중 칼럼] '징비록'을 다시 읽으며

조선일보 2019.07.12. 03:17

 

통치자, 선악 이분법 역사 재단.. 현실 외면하면 환란 닥친다는 징비록의 경고
한·일협정 성사시킨 건 박정희, 한·일 관계 극대화한 건 DJ.. 나라 살린 현실주의 리더십의 정수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징비록(懲毖錄)'은 가슴을 찌른다. '쓰러지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다'는 서애 유성룡(1542~1607)의 말이 통렬하다. '징비록'을 능가할 임진왜란(1592~ 1598) 기록물은 없다.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국정과 군무(軍務)를 총괄한 서애는 '난(亂)의 근본을 밝힌다.' 국가 리더십 붕괴가 부른 총체적 위기와 비정한 국제정치를 낱낱이 해부한다. '징비록'은 1633년 처음 출간된 후 1695년 일본에서도 간행됐고 중국에서도 읽혔다.

'지난 잘못을 징계해 미래의 환란을 경계함'이 징비(懲毖)다. 선조가 명나라로 내부(內附·귀순)하려 하자 유성룡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민심 수습과 산업 장려, 명과의 교섭, 군비 강화도 서애의 몫이었다. 명·왜의 조선 분할 획책을 온몸으로 저지한 것도 서애였다. 유성룡은 '징비록' 맨 앞에 그 100여 년 전 외교·국방 전문가인 신숙주(1417~1475)의 유언을 인용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1443년 27세에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로 일본을 분석한다. 나라의 길을 묻는 성종에게 신숙주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문재인 정부의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한국은 반일 감정이 들끓고 절반이 넘는 일본 시민이 대한(對韓) 무역 제재에 찬성한다. 유성룡이 '간교한 왜적의 용병(用兵)이 속이지 않는 법이 없다'고 개탄한 것처럼 음험한 아베 정부에 우리가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분노만으로 나라를 이끌 순 없다.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는 선거 방략이자 한국 경제의 중추인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꺾는 경제 전술이다. '전쟁을 할 수 있는 정상 국가'로 나아가려는 거시적 국가 전략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 통치의 본질에 대한 합의 부재가 한·일 갈등의 근원이다. 일본은 1910년 한·일 병합과 35년의 식민 지배가 국제법적 합법이었다고 강변한다. 일제 식민 통치는 불법 강점이며 사죄와 배상 책임이 따른다고 확신하는 우리와 정반대다. 이런 이견을 남긴 채 세계 냉전 체제에서 상호 국익을 위해 타협한 게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이다. 한국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된, 당시 일본 외화 보유액의 4분의 1인 무상 3억달러와 유상차관 2억달러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한국은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으로 여기고, 일본은 '독립 축하금'이자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주장한다.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한·일협정 제2조 1항은 이런 절충의 산물이다. 현대 한·일 관계의 기초이자 역사 전쟁의 근원이 된 봉합이었다. 한국인의 민족 감정이 일본의 주장을 수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민족 감정과 국가이성이 격렬히 부딪치는 지점이다. 그러나 한국은 살아남기 위해 국가로서 타협책을 선택했다. 한·일협정이 한·일 두 나라의 호혜적 발전 토대가 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국가를 과거사와 민족 감정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한·일협정을 성사시킨 건 박정희였지만 한·일 관계를 극대화한 건 김대중(이하 DJ)이다. 1965년 야당 의원 DJ는 박정희가 밀어붙인 한·일 회담을 공개 지지해 '토착 왜구'로 낙인찍힐 선택을 감내했다. DJ의 대승적 일본관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승화된다.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한 현대 일본을 높이 평가한 DJ에게 호응해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는 일제 식민 통치를 '통절하게 반성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화답한다. 현대사의 최대 라이벌 박정희와 DJ가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함께 정초한 것이다. 나라를 살린 현실주의 정치 리더십의 진수다.

서애가 감당한 현실은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어 길가에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진" 현장이었다. 성리학 이념에 대한 맹종이 망친 나라를 현실주의 시무(時務) 리더십이 살렸다. 유성룡의 안목은 전쟁 발발 전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당상관 전라좌수사로 7단계나 뛰어넘어 발탁한 데서도 입증된다. 이게 나라의 명운을 갈랐다. '징비록'은 통치자가 선악 이분법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현실을 외면하면 국가에 환란이 닥친다고 외친다. 외교 안보와 경제를 이념과 도덕근본주의가 망친다고 고발한다. 위기의 한·일 관계 앞에서 국보 제132호 '징비록'의 절규가 가슴을 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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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문화살롱] '징비록' 우리보다 더 탐독한 日

한국경제 2019.07.12. 00:22


1592년 5월 23일 부산 앞바다로 왜선이 몰려왔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선(敵船)이 90척이라고 보고했다.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이라고 했다. 일본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고 온 1군 함대는 700척, 군사 1만8700명이었다. 갑작스레 대군을 맞은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곧 2군 2만2000여 명, 3군 1만1000여 명 등 17만여 명이 밀어닥쳤다. 이후 7년간 조선은 아비규환의 전장으로 변했다.


조선이 왜적의 침입에 전혀 대비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성벽을 개축하고 방어진을 다듬었다. 그러나 7년 이상 전쟁을 준비한 일본을 당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정보 부족이 문제였다. 한동안 통신사를 통해 일본 사정을 파악하던 조선은 일본의 전국시대 혼란기인 100여 년 동안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아 내부 동향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번역·주해 곁들여 국가적 연구

집권층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웠다. 전란을 1년 앞둔 시기에는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졌다. 그해 일본에서 돌아온 통신사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상반되게 보고했다. 국론은 더 분열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답서에 명나라를 치겠다는 내용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이런 잘못을 징계하고 후환을 경계하기 위해 전시 재상이었던 류성룡이 남긴 책이 ‘징비록(懲毖錄)’이다. 류성룡은 첫 장에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조정의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저술한다”고 썼다. 양국 지휘관의 전략과 전투 형태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왜적’ 외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함께 쓰면서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다. 1604년 완성된 원고는 1633년에 간행됐다.


‘징비록’은 얼마 뒤 일본에 알려졌고, 1695년 교토에서 출판됐다. 누구나 읽기 쉽게 일본어 훈독까지 곁들여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직을 비하적으로 표현한 ‘관추(關酋·우두머리)’를 ‘관백(關白)’으로 수정한 것 외에는 원문에 충실했다. 일본인들은 이를 통해 조선의 사정을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조선 연구의 핵심 자료가 됐다. 일본 사학자들은 예외 없이 이 책을 연구 기반으로 삼았다. 이순신 장군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때부터 생겼다. 전근대 일본의 최대 국제전쟁에 대한 관심이 ‘징비록’에 투영돼 있다.


우린 禁書 지정…교훈도 못 얻어

1719년 일본 오사카 거리에서 이 책을 발견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국가 기밀이 새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조정은 ‘징비록’의 해외 유출을 금했다. 나라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며 국내에서도 금서(禁書)로 묶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널리 공유하지 못했다. 그 사이 일본은 조선 연구에 박차를 가하며 ‘징비’의 정신을 스스로 다졌다.

일본판 서문의 한 구절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조선인이 나약하여 빨리 패하고 기왓장과 흙이 무너지듯 한 것은 평소 가르치지 않고 방어의 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중략) 전쟁을 너무 좋아하는 것과 전쟁을 잊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 도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너무 좋아했기에 망했고, 조선은 전쟁을 잊었기에 망할 뻔했다.”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 공세를 보면서 400년 전 ‘징비록’을 다시 떠올린다. 그때처럼 일본의 공격 징후는 여러 번 있었다. 한국 주재 외교관들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이전에 한국 정부가 움직여야 한다”고 조언까지 했지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번엔 일본의 부품·소재 수출규제에 관한 21세기 징비록을 써야 할 판이다. 이 또한 무용지물이 될까 두렵지만….

         
고두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