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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가을 전어가 어디로

바람아님 2019. 9. 24. 11:32

(조선일보 2019.09.24 한현우 논설위원)


한 남자가 한강대교 위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고 있다. 복권 당첨금을 갖고 가출한 아내를 찾아오란다.

다른 남자가 그 아래로 가더니 불을 피우고 전어를 굽는다.

전어 대가리에서 떨어진 기름이 불에 닿으며 연기가 피어오르자 말없이 전어 안주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켠다.

자살 소동남은 마침 전어의 고장인 경남 사천 출신. 그는 냄새를 참지 못하고 내려와 소주잔을 받는다.

허영만 만화 '식객'에 나오는 장면이다.

집 나간 며느리가 아니라 죽기로 맘먹은 사람도 돌아오게 하는 맛이다.


▶조선시대 서유구는 실용서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귀천이 모두 좋아하고 맛이 좋아 사는 사람이 돈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전어(錢魚)라고 했다.

반면 정약전 '자산어보'에는 그 모양이 화살촉처럼 생겼다고 화살 전(箭) 자를 썼다.

따뜻한 서해·남해에서 주로 잡히는 가을 전어는 2000년대 이후 전국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전남 광양, 경남 창원·사천의 전어 축제가 유명하다.


[만물상] 가을 전어가 어디로


▶예전 남도에서는 전어가 잡히면 버렸다고 한다. 상품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포구 마을에서는 김치·깍두기 담글 때 넣거나 젓갈로 담가 먹었다.

겨울 과메기처럼 제철 별미이긴 하나 고급 생선은 아니란 뜻이다.

2000년대 중반 양식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자연산이 인기여서 가을이면 남해안 군 통제수역에서 전어잡이 어선들이

단속에 나선 해군과 숨바꼭질을 벌이기도 한다.


▶가을 전어는 지방 함량이 100g당 10g이나 돼 봄 전어보다 세 배 넘게 많다.

그만큼 상하기도 쉬워 옛날엔 내륙지방에서 먹기 어려웠다.

가을 전어는 회나 무침으로도 먹지만 연탄불에 구워 대가리부터 먹는 게 별미다.

젓가락질할 만큼 살이 차지 않는 데다가 잔가시가 많아 통째 꼭꼭 씹어 먹으면 고소하다.

일본에서는 봄 전어를 더 쳐준다. '싱코(新子)'라고 부르는 손가락만 한 생선이다.

우리말로는 '전어사리'라고 하는데 이것을 초밥에 얹어 먹으면 살살 녹는다고 한다.


▶올해 해수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 전어가 줄고 잇단 태풍 때문에 조업 일수도 적어 전어 값이 치솟고 있다고 한다.

매년 이맘때쯤 판촉 행사가 열리던 대형 마트에서도 전어가 사라졌다.

어떤 수산물 축제에선 양식 전어를 사서 갖다놓아야 할 형편이란다.

시인 정일근은 '가을 전어'에서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다고 읊었다.

올가을 도도해지려면 돈이 좀 더 들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