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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동]천원짜리 국수 팔아 식당 확장까지, 비결은?

바람아님 2014. 1. 25. 22:33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 -이글은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가 기획 취재한 글입니다

작은 특징 하나가 때때로 그 사람을 기억나게 한다. 도시나 마을도 마찬가지. 어처구니없는 기억 한 조각이나 사소한 풍경 하나가 그때를 불러낸다. 때론 부분이 전체보다 힘이 세다. 그런 조각들로 도시를 여행하려 한다. - 기자 말


가난한 시절에도 놀건 놀고, 볼 건 봐야 했다. 그럴 때 맘 편히 갈 수 있는 곳이 낙원동이었다.
1990년대 후반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 가장 신경 쓴 건 생활비였다. 어쨌든 아끼고, 또 아껴야 했다. 그래도 놀 건 놀아야 했고, 다닐 건 다녀야 했다. 가끔씩 밖에서 먹어야 할 때 값싸게 배를 불릴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다들 레이더를 돌렸다.
2000년 전후쯤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고향 형이 괜찮은 식당이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 당시 나는 제법 값싸면서 푸짐한 식당 목록을 갖고 있었기에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설마 내가 모르는 곳이 있겠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내렸다. 선배 손에 이끌려 식당에 들어갔다. 손님이 많았다. 빈자리가 없어 이미 밥을 먹던 손님과 합석했다. 음식을 시킬 것도 없었다. 메뉴가 단 하나뿐이라 자동으로 사람 수대로 밥이 나왔다. 국밥 한 그릇에 깍두기 한 접시. 그렇게 1500원이었다. 충격이었다. 서울 시내에 이 가격에 한 끼 식사를 파는 곳이 있다는 건 상상 밖이었다. 그 당시 알고 있던 어떤 식당보다도 가격이 쌌다.

어르신들로 가득한 식당, 동네를 가득 메운 '쿰쿰'한 냄새와 분위기, 뒤통수를 때린 놀라운 가격. 그렇게 낙원동은 내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죄지은 느낌 들게 만들었던 동네, 낙원동



2014년 1월 찾아갔을 땐 가격이 살짝(?) 올라 있었다.



그 뒤로 사람이 여럿이 모일 때마다 낙원동에 회식하러 가곤 했다. 두세 명이서 밥과 술까지 마셔도 만 원이면 충분한 곳이었다. 물론 밥과 술을 대부분 집에서 해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낙원동까지 진출하는 것도 특별한 이벤트이긴 했다.
2005년 가을, 나는 낙원동에서 이별 선고를 했다. 올린 전세보증금을 채우느라 전 재산을 막 털어 부은 때였다. 아는 어르신이 만남을 주선해 세 번째 만난 분에게 '인연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통장 잔고는 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역시 나랑 처지가 비슷했던 선배에게 가진 돈을 내 통장으로 보내라 했다. 그렇게 만 원을 만들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국수 하나와 닭곰탕 하나를 시켰던 것 같다. 그렇게 3500원. 막걸리 하나도 시켰다. 한 병을 다 비우도록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다시 한 병을 시켰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떤 말씀이든지 하셔도 돼요. 제가 이별엔 익숙하거든요."

결국 그 자리에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만 원으로 셈을 한 뒤에도 넉넉히 남아 집까지 지하철을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문자로 이별통보를 했다.

한 번은 회사 사람들이랑 저녁 회식을 낙원동에서 했다. 초여름이었다. 날씨가 따뜻한 계절이 오면 탑골공원을 낀 낙원동엔 간이탁자가 놓인다. 일행은 간이탁자에 앉아 밥과 술을 마셨다. 계산할 때쯤 회사 왕고참이 했던 말이 귀에 선하다.

"아니, 이렇게 먹고 이것만 내도 돼? 죄짓는 것 아냐?"

서울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 동네 음식가격은 터무니없었고, 심지어 죄를 짓는 기분까지 들게 만들었던 셈이다. 그랬다. 낙원동은.

국숫값 1000원, 그래도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원동 탑골공원 근처 식당가에선 2000원 정도면 한 끼 식사가 가능하다. 주머니가 팍팍한 이들에겐 낙원동이 천국이다.
몇 해 전 금요일 낮, 탑골공원 근처 낙원동을 일부러 찾았다. 그 전 낙원극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식당에 들렀다. 이름은 부자촌이었다. 낙원동에 부자촌이라니, 어울린다 싶었다. 그 식당은 2004년 문을 열었단다. 12~13명 정도 들어서면 가득 찰 정도로 좁은 곳이었지만 빈자리가 없었다. 손님의 연령대는 높았다. 분위기로 보아 50~60대로 보였다.
그곳 국숫값은 1000원이었다. 낙원동 식당들은 세상 물가와는 동떨어진 가격대를 제시했다. 음식 가격만 따지고 본다면 지리산 청학동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싼 가격이 가능한 거죠?

"식당을 하기 전 근처 동네에서 유통업을 했어요. 재료를 싸게 가져오는 법을 알지요."

-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낮아요.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조금 더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장사 아닌가요?

"여기는 싼 동네예요. 가격 올려봤자. 최대 30% 정도고. 그렇게 올려봤자 뭐 하겠어요. 그냥 이 가격 받으면서 사람들이 마음 편하게 오게 하는 게 나아요."

우리 일행은 셋이었다. 세 명이서 국수 한 그릇씩 시키고 막걸리와 맥주를 한 병씩 시켰다. 가격은 8000원.

- 안주나 다른 걸로 돈을 버시나 봐요. 국수는 이윤이 안 남죠?

"그래도 남아요(웃음)."

당시 인터뷰를 했던 식당은 낙원동의 정서를 대변했다. 낙원동의 묘한 정서는 2008년 부자촌 주인이 했던 행동에서 드러난다. 당시 2000원 하던 콩국수를 1000원으로 내렸다. 3000원 하던 음식은 2000원으로 내렸다. 서민들 살림살이가 나빠졌으니 음식 가격을 내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단다. 일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쉽게 이해하긴 힘든 일이다.

낙원동에서 싼 음식점이 몰린 곳은 종로17길이다. 탑골공원 동쪽 담벼락 쪽에 몰려 있다. 탑골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주고객이란 뜻이기도 하다. 고객이 음식값을 결정한다는 점에 비춰보면 종로17길 식당들의 음식값이 싼 것은 탑골공원 방문객이 주로 어르신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탑골공원은 언제부터 서울지역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을까. 1968년 4월 9일 치 < 경향신문 > 에 '노인들의 유일한 벗인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의 옛 이름)'이란 기사가 나오는 걸 보면 그 역사가 꽤 깊다. 주고객이 어르신들이고, 주로 주머니가 팍팍한 어르신들이라면 주변 음식점들도 고객 맞춤형 음식을 내놔야 했을 것이다.

1961년 5월 18일 치 < 동아일보 > 에는 '탑동공원(탑골공원의 옛 이름)의 24시'란 기사가 실렸다. 꽁초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을 다뤘는데, "백 환짜리 조반을 마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물가를 고려해서 유추해보면 지금 가격으로 대략 1000원에서 1500원 정도 하는 식사다. 온달치킨센타 대표인 홍성운씨가 한 매체에서 밝힌 이야기를 살펴봐도 탑골공원 일대에서 다른 지역과는 다른 식당가격이 매겨졌음을 알 수 있다.

"형님은 설렁탕이 4000원 하던 시절, 파고다공원 노인들에게는 설렁탕을 1200원에 팔았다."( < 한겨레 > 2012년 5월 23일)

가난한 어르신들이 많이 찾다 보니 무료 급식이나 이발도 종종 이뤄졌다. 1990년 서울시가 후원하는 경로식당이 처음 문을 연 곳 또한 낙원동이었다. 이런 조치들까지 겹쳐 낙원동엔 자연스럽게 '낙원동 가격'이 만들어졌다.

건국대·단국대·국민대가 태어난 곳... 한때는 부자들이 노닐던 명소



탑골공원 서쪽 자리엔 1968년부터 1983년까지 2층짜리 상가건물인 파고다아케이드가 있었다.
주머니가 팍팍하다고 느낄 때마다 낙원동은 나에게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지금이야 낙원동은 탑골공원이 있는 곳이고, 어르신들 천국으로 불리는 값싼 동네지만 그건 낙원동 역사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언젠가 낙원동 '건국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다. 꽤 여러 번 봤지만 '건국'이란 상호가 눈에 들어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건국' 상호가 주변에 많았다. 건국다방, 건국카센타, 건국표구 등.

그 자리엔 과거 건국대학교가 있었다. 4층짜리 주차장 자리는 과거 낙원동 교사였다. 건국대뿐만 아니라 단국대·국민대도 모두 낙원동에서 시작한 뒤 지금 자리로 확장 이전했다고 한다.

당시 탑골공원은 얼마나 근사했을까. 사람들은 서울 최초 근대식 공원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탑골공원 자리에는 조선시대 도성 내 3대 사찰로 불린 원각사, 조선 태조 때 조계종 본사였던 흥복사가 있었으니 명당이라 불릴 만한 터다.



서울 최초 근대공원인 탑골공원 안에는 국보 2호인 원각사지2층석탑도 있다. 왼쪽 유리상자로 감싼 게 바로 원각사지2층석탑이다. 탑 주위에서 탑돌이를 하며 절을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통계청이 1994년 발표한 '통계로 본 개화기의 경제 사회상'을 보면 1910년 서울에서 기와집이 가장 많았던 곳은 탑골공원 일대였다. 즉, 낙원동은 서울 최상류층이 살던 동네였다. 지금 타워팰리스가 있는 도곡동을 당시 낙원동과 비교할 수 있을까.

1960년대 서울시는 낙원동에서 야심 찬 실험을 한다. 초고급 주상복합건물인 낙원상가아파트를 세우는 것. 한 건물 안에 상가와 시장·영화관·아파트가 들어간 복합건물은 당시 대중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 재래시장이 지하로 들어간 것도 전에 없던 발상이었다.

건물을 도로 위에 세운다는 개념도 놀라웠다. 서울시는 도로법과 건축법 위반을 피하기 위해 1층을 비웠다. 건물 아래로 도로가 지나가게 된 이유다.

낙원상가아파트에 대한 기대치는 매우 컸다. 1967년에서 1968년으로 넘어가는 두 달 만에 땅값이 세 배나 뛴다. 1969년 기사에서 낙원상가아파트는 삼풍 삼원아파트, 외인아파트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아파트로 손꼽혔다.



낙원상가아파트는 1969년 건립 당시 건물 안에 상가, 재래시장, 영화관, 아파트가 같이 있는 초고급, 초화화 빌딩이었다. 도로 위로 건물을 지은 것도, 건물 아래 시장을 넣은 것도 독특한 시도였다.
때마침 탑골공원 서쪽에 담벼락을 낀 2층짜리 아케이드를 세웠다. 워낙 서울시가 의욕 넘치게 밀어붙여 그 자리에 있던 종로시립도서관은 갈 자리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철거돼야 했다. 결국 도서관은 사직공원 안에 부랴부랴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 시절, 주머니가 두둑한 이들에게 낙원동이 천국이었을 터다. 낙원동은 항상 천국이었지만 만인의 천국은 아니었다. 어쩌면 만인의 천국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모든 사람의 소원을 다 들어주더라도 완전한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모순처럼, 사람은 애초부터 끊임없이 비교하며 갈등해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낙원동은 가난하고 주머니가 팍팍하며, 세상 빠르기가 버거운 어르신들의 천국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탑골공원 옆 식당 근처로 지인을 데리고 갔다. "싸지?"라며 의기양양해하는 내 옆을 한 어르신이 지나가며 퉁명스레 한마디를 했다.

"가격 많이 올랐어. 옛날에는 거기 밥이 300원이었는데 말이야."

덧붙이는 글 |

2014년 1월 부자촌을 찾아갔을 때 식당은 이전보다 2배 정도 커져 있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식당들도 그대로였다. 터무니 없이 싸게 파는데도 꾸준히 팔리는 곳, 그런 식당들이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그런 식당들을 찾는 사람들이 변함없이 있는 곳이 바로 낙원동이다. 낙원동 시계는 여전히 변함없이 '째깍째깍' 잘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