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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 기행] 나를 품어준 '대지'를 향한 마지막 손짓…굿바이! 나의 고향

바람아님 2014. 1. 24. 20:59
                    리차드 레드그레이브 ‘고향에 작별을 고하는 이민자'

산업혁명 꽃피운 英, 도시 빈농·전통사회 붕괴…부조리한 현실의 홍역 앓아
산업사회 '그늘' 신랄한 고발, 문학계 영향…추종자 낳아 "아름답지 않다" 비난도                

 

"곧 이민선을 타고 미지로 떠나는 가족…얘들아~고향의 모습 잘 담아두렴
남편은 슬픈 얼굴 감추려 고개를 돌리고 여인의 두 눈엔 눈물이 차오른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잠시도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꿈틀대며 푸른 하늘을 집어삼키는 차가운 콘크리트 구조물은 자신의 삭막한 영역을 무서운 기세로 확장해 간다. 그것들의 가공할 기세와 위압감은 그곳에 서식하는 자들에게 한 뼘의 마음 붙일 공간도 허용치 않는다. 아스팔트라는 이름의 검정 카펫으로 뒤덮인 그 메마른 공간에 우리는 과연 고향이라는 정서적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혹시 고향이 있다면 그것은 지리적 실체가 아닌 편리와 소비,욕망이라는 하나의 추상적 시스템으로서만 존재하리라.

산업화의 거센 바람이 세상을 뒤덮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었다. 그 시절 대지는 사람들의 삶과 뒤엉킨 내남없는 유기적 통합체였다. 땅은 그곳에 서식하는 이들에게 있어 자신을 보듬어주는 몸의 일부였고 일종의 산소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문명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고향을 앗아가 버렸다. 농업의 기업화 바람 속에 소농민은 자신들의 피와 땀이 서린 토지에서 추방됐고 전통적 가내수공업은 도시의 공장 생산품 앞에 설 땅을 잃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부양해준 대지에 작별을 고했다. 구차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도시노동자가 되었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홍역을 치른 빅토리아 왕조(1832~1901)의 영국인만큼 그런 정신적 상실감을 사무치게 느낀 사람들도 없으리라.'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화려한 수사 뒤엔 전통사회의 붕괴와 타율적 실향민의 양산이라는 그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난 이들의 대다수는 도시로 흘러들었지만,상당수는 신대륙 혹은 낯선 식민지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 했다. 1852년 한 해 동안만 35만명의 영국인이 이민을 갔고,빅토리아 왕조를 통틀어 무려 1500만명이 배에 몸을 실었다.

시인 올리버 골드스미스는 "우리는 황금을 위해 영국 해안 도처에서 우리의 소중한 아들들을 얼마나 많이 떠나보냈던가?"(《여행자》 중에서)라고 탄식했고,찰스 디킨스는 소설 《데이비드 커퍼필드》에서 출발을 앞둔 이민선의 착잡한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 그림 참조)

화가들도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리처드 레드그레이브(1804~1888)는 그런 움직임의 원조였다. 그는 작품을 통해 여자 봉제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하는 등 근대 산업사회의 그늘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그의 작품들은 그림의 주제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는 아카데미의 견해와는 배치되는 것이어서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현실 고발적인 회화는 윌리엄 포웰 프리드,포드 매독스 브라운 등 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엘리자베스 개스켈,찰스 킹즐리 같은 소설가,토머스 후드 같은 시인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향에 작별을 고하는 이민자'(1858)는 그러한 시대의 아픔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레드그레이브의 대표작 중 하나다. 작품의 무대는 런던 남서부 서리(Surrey)의 어빙거(Abinger)라는 작은 마을이다. 원래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던 이곳은 1830년 말 증기기관차가 들어오면서 거센 도시화의 바람에 휩싸인다. 런던으로 통근이 가능한 거리였기 때문에 값싼 주거지를 찾아 도시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됐고 철로변을 따라 여기저기 공장이 들어섰다.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농민들은 공장노동자가 되거나 새로운 곳으로 이민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이곳에 살았던 레드그레이브는 주변에서 목도한 이민자의 아픔을 화폭에 옮겼던 것이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독자라면 이 작품을 보며 평상심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화면의 오른쪽을 보면 이민을 떠나는 한 가족이 언덕 위에 올라 자신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집과 대지를 바라보며 작별을 고하고 있다. 화가는 그들을 마치 대지의 아들인 양 황토색과 갈색으로 묘사하여 깊은 연민의 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막 가장은 마지막으로 모자를 벗고 두 팔을 벌려 자신을 키워준 대지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한껏 벌린 가슴으로 고향을 으스러질 만큼 아프게 포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가는 그의 두 뺨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얼굴 뒤로 감췄다. 남편의 처연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부인의 눈에도 눈물이 그득하다. 그러나 그 슬픈 표정 속에는 작별의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 불어닥칠 혹독한 시련에 대한 두려움도 뒤섞여 있다. 실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의 밝은 표정은 그래서 보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아마도 화가는 가장과 부인을 통해 전통사회의 붕괴와 고향 상실에 대한 자신의 아쉬움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이 흘리는 눈물은 곧 화가의 눈물이자 전통사회가 근대사회에 자리를 내주며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다. 그 눈물의 의미를 오늘에 되새겨볼 만하지 않은가. 개발만능주의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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