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5. 3. 15. 00:38
[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1948년 남북 협상에서
김일성에 농락당한 김구
유엔소총회에 남한 단독 선거 문제가 회부되자, 김구는 김일성과 직접 협상해서 분단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8년 2월 16일 김구는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정치 지도자 간 통일 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자”는 소위 ‘4김 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비밀리에 보냈다. 그로부터 40일 가까이 지난 3월 25일 평양방송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 회담’을 제의한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거물 대남 공작원’ 성시백을 통해 김구‧김규식에게 지극히 사무적이고 고압적인 문체의 ‘초청 서한’이 전달되었다.
“당신들은 모스크바 3상 결정과 미소공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해 거듭 파열시켰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미소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 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 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이렇듯 김구‧김규식을 준엄하게 꾸짖은 김일성은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를 소집하겠으니 참석할 의사가 있으면 3월 말까지 통지하라고 덧붙였다.
평양행을 만류하는 둘째 아들 김신에게는 “빨갱이들도 피와 뼈를 같이한 우리의 동포다.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봐야겠다. 나는 38선을 베고 죽더라도 가야겠다”고 타일렀다.....4월 19일 경교장에는 김구의 평양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청년 학생 500여 명이 운집했다....김구는 뒷담을 넘어 경교장을 빠져나와 38선을 넘었다.
4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나는 연석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 나는 단지 김일성을 만나러 왔다”며 연석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김일성과 김두봉의 거듭된 설득으로 김구는 5일 동안의 연석회의 일정 중 딱 한 번 3일 차 오후 회의에 참석해 축사했다.....북한 참가자들은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박수 한 번 치지 않았다. 머쓱해진 김구는 축사를 마치고 곧바로 퇴장했다.
5월 4일 남한으로 돌아온 김구는 귀국 성명서에서 김일성에게 연백저수지 개방과 송전 지속, 북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 등을 방북 남북 협상의 주요한 성과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5‧10 총선거 이후 김일성은 5월 14일 남한으로 송전을 중지했고, 8월 25일 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북한의 역사는 김구와 김일성의 회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김구는 위대한 수령님께 상해임시정부의 인장을 내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내놓은 인장을 그냥 가지고 가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는 인민대중의 두터운 신임이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었다”....통일국가 수립을 향한 김구의 염원은 김일성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했다.
https://v.daum.net/v/20250315003823709
모욕 견디며 매달린 남북 협상, 김일성은 열흘 만에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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