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일사일언] 책장 가득 봄이 왔네

바람아님 2015. 2. 26. 09:29

(출처-조선일보 2015.02.26 공혜진 일러스트 작가)


	공혜진 일러스트 작가
몇 해 전부터 방구석에는 책이 쌓여 만들어진 '책탑'이 하나 있다. 
동네 뒷산을 오를 때나 거리를 다니면서 눈에 들어오는 나뭇잎을 하나씩 책 사이에 넣곤 했다. 
그것들이 어느새 책탑을 이뤘다. 방을 오갈 때면 인사하듯 한 번씩 눈길을 줬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마다 점점 높아가는 책탑을 보는 것이 내심 뿌듯했다. 
시간의 흔적이 방구석에 자리하고 있어서 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든든했다.

유난스레 잠이 오지 않는 겨울밤, 책상에서 일어서다 등 뒤에 있는 책탑에서 눈길이 멈췄다. 
책탑 위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한 장씩 넘겨봤다.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어느 장에서는 제비꽃 잎이, 꽃마리꽃이, 꿩의다리 잎이, 싸리나무 잎이, 
고사리의 푸른 싹이, 계수나무 잎이 나타났다. 
언제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책이 그 어떤 그림책보다 아름다운 그림을 품고 있는 책으로 변해 있었다.

종이보다 더 얇게 눌린 나뭇잎 한 장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며 감탄하다가 지난봄 산에서 나무에 난 새순을 보며 봄이 왔다고 
소리치던 기억이 떠올랐다. 또 다른 책장에서는 제법 커다란 아카시아 꽃송이가 나왔다. 자동으로 코를 책에 대고 킁킁거렸다.
책장에서 희미하게 아카시아향이 느껴지자 아카시아나무 가득 울리던 벌들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해서 놀랐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잎들의 모습이 '3D 영화'를 보는 듯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높은 책탑을 허물어 바닥 가득 잎들을 꺼내 놓고 감탄하며 밤을 보냈다. 
늘 방 한쪽 구석에서 탑을 이루고 있던 책탑의 존재가 든든했던 것은 이런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서였나 보다.


	[일사일언] 책장 가득 봄이 왔네
 /공혜진 제공
어떤 그림을 품고 있는지 예측할 수 없는 책들로 이뤄진 책탑이 내 방구석에 있었다. 
봄이 오면 앞뒤가 빳빳한 양장 책을 골라 들고 산으로 갈 것이다.



(각주 : 일러스트(illust) - 어떤 의미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삽화, 사진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