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동북아 역사전쟁> ①일본의 근대 산업유산

바람아님 2015. 4. 14. 16:12
연합뉴스 2015-4-14

1850~1910년으로 시기 한정, 강제동원의 기억은 일부러 지워

이코모스 등재 권고로 세계유산 사실상 확정

"등재 보고서에 강제동원 넣거나, 제목에 시기 한정해야"

<※ 편집자 주 = 한·중·일 동북아시아 삼국 사이에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둔 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를 '역사전쟁'이라 부르기도 할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일본 중학교 지리·공민교과서 18종이 검정을 통과하고 그에 적지 않은 역사왜곡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과 중국을 긴장케 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연합뉴스는 동북아 3개국이 연관된 역사논쟁 중에서도 작금 유네스코를 무대로 전개되는 쟁점 사안 3가지를 골라 점검해 봅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김순길(金順吉)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2915년 1월 노무자로 강제징용돼 나가사키(長崎) 미쓰비시(三菱)중공업 조선소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그 해 8월 원자폭탄이 떨어져 부상했다. 1998년 2월 20일 응어리진 일생을 75세로 마감하기까지 그는 말년을 원폭 피해와 그 합병증인 폐암과 싸우는 한편 과거사 피해 보상을 거부하는 일본정부와 기나긴 법정 투쟁을 벌였다.

김순길을 포함해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에 징용된 조선인 노무자는 대략 4천700명에 이른다고 파악된다. 그 중 한 명은 사업장에서 사망했고 149명은 원폭 피해를 봤다.

저승 어딘가에서 쉬고 있을 김순길을 다시금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가 미쓰비시 조선소를 포함해 규수(九州)와 야마구치(山口) 지역 근대화 산업시설 23곳을 하나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신청하면서 이러한 강제징용의 역사는 쏙 빼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은 2014년 1월말, 규수와 야마구치 지역 8개 현 11개 시에 소재하는 이들 근대 산업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 달라는 신청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했다. 이름은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규수(九州)·야마구치(山口)와 관련 지역'이라 했다. 그에 대한 영문 명칭으로는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Kyushu·Yamaguch and Related Areas'가 확정됐다.

그 등재 여부는 오는 6월28일부터 7월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이 자리에서는 한국 정부가 신청한 공주·부여·익산 지역 '백제역사유적지구' 등재 여부도 판가름난다.

일본 근대 산업유산은 백제역사유적지구와 마찬가지로 4월 현재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회)에서 심사를 진행 중이다. 이코모스는 현지실사 등을 통해 해당 유산이 등재할 만하면 세계유산위에 '등재' 권고를 하게 된다. 등재 권고를 받으면 이변이 없는 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 신청한 심사 결과를 세계유산위에 보고하면서 공개를 한다. 늦어도 다음달이면 결과가 드러난다.

이와 관련, 이코모스는 이미 지난달 11~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올해 심사 대상 세계유산 후보들에 대한 등재 여부를 사실상 결정한 '세계유산 패널회의'를 열었다. 한국 정부와 이코모스 관련 인사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일본 근대 산업유산은 이미 우리의 백제역사유적지구와 함께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이 등재신청한 내용이 한국을 분노케 하고 있다. 등재 후보 대상 산업유산 23곳 중 총 7개소가 태평양전쟁 중에 조선인이 대규모로 강제 동원된 곳이지만 이런 내용이 등재신청서에는 쏙 빠졌기 때문이다. 이들 7개소를 보면 나가사키 조선소가 제3센쿄·대형크레인·옛 목형장의 3곳이고, 다카시마 광업소는 다카시마 탄광과 하시마 탄광의 2곳이 있으며, 그리고 '미이케 탄광 및 미이케 항'과 '야하타 제철소'가 나머지 두 곳을 차지한다.

우리 정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들 7개소에는 약 5만7천900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무자가 강제동원되고, 그 중 94명이 동원 중에 사망하고 5명은 동원 중에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 징용 노무자 숫자를 사업장별로 보면 나가사키 조선소 3곳을 합쳐 4천700명에 이르는 것을 비롯해 다카시마 탄광 4만명, 하시마 탄광 600명, 미이케 탄광 및 미이케 항 9천200명, 야하타 제철소 3천400명이다.

물론 일본이라고 할 말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7개소를 포함한 23개 산업유산을 '메이지시대(1868~1912)'로 한정해 세계유산 중에서도 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했다. 일본이 이미 공개한 등재신청 요약서라든가 관련 홈페이지,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 등에 오른 자료를 참조할 때 더욱 구체적으로는 이들 유산의 역사 중에서도 1850년 이후 1910년까지의 한정된 시기만을 떼어내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그 하한 시기가 왜 하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이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정부가 과거사 책임 논란을 피해나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강제동원의 기억을 일부러 지운 것이다.

국내 한 세계유산 전문가는 "견주자면 일본의 이번 행위는 예컨대 불국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면서 불국사 1천300년 역사 중에서 통일신라시대 300년만을 떼어내 그것만을 등재해 달라고 하면서 그 나머지 고려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는 천년의 역사는 버린 일과 같다"면서 "이는 세계유산 정신과도 하등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들 산업유산이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내세우는 대로 "막말(幕末)에 서양기술을 도입한 이래 비(非) 서양지역 최초로 극히 단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특기할 만"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을 떼어내 역사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하고 그 이후 전개된 어두운 역사를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 이들 산업유산은 메이지 시대를 지나 도약기를 지나면서 그것을 발판으로 특히 식민강점기와 태평양전쟁기에는 군수산업으로 극성을 구가했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인력을 강제징용 노무자라는 방식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조달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등재신청서 어디에도 이런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이들 산업유산 등재는 세계유산 탄생의 법적 근간으로 세계 모든 인민을 위한다는 세계유산협약은 물론이고 국가간 협력과 평화 유지를 강조하는 유네스코헌장이 표방하는 원칙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세계유산의 등재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일본의 등재추진위 홈페이지나 유네스코 홈페이지에 의하면 일본은 이들 산업유산을 등재 신청하면서 세계유산, 특히 문화유산이 되기 위해 유네스코가 규정한 6개 조건 중 ⅱ·ⅲ·ⅳ의 세 가지를 들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등재 조건 ⅱ는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해야 하며, 등재조건 ⅲ은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훌륭한 증거일 것"을 요구하고, 등재조건 ⅳ는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을 든다.

우리 정부는 이들 조건 어디에도 일본 근대 산업유산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 정부는 무엇보다 등재 대상 시기에서 이들 산업유산의 전성기를 제외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보통 산업유산이라면 등장에서 발전, 중단 혹은 소멸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가치를 판단해서 등재 가치를 평가한다. 한데 일본 근대 산업유산들은 1910년 이후 더욱 전성기를 맞고, 특히 2차 세계대전 중에 최고의 활황기를 구가하다가 그 이후까지 계속 가동된 시설이다. 따라서 이들 전 기간에 걸친 가치 판단이 등재 심사서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 정부는 지난달 31일 외교부 대변인 정례브리핑을 통해 일본 근대 산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움직임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는 한편 이를 막기 위한 외교력을 집중하겠다는 밝혔다.

하지만 이를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세계유산센터에 우려를 표명함과 함께 등재를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알려졌지만 이는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비판 또한 적지 않다. 세계유산센터가 보일 반응은 "우리는 정치적인 고려는 하지 않는다"는 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일본 측이 우리의 반대 표명이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취할 방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이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한국은 세계유산위 21개 위원국 중 하나라는 점이다. 세계유산위에서는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발언권은 위원국에만 주어지며, 모든 결정도 위원국들이 한다.

가장 이상적인 해결 방안은 등재 권고가 이뤄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코모스에서 이미 등재를 권고한 마당에 이를 뒤집을 수는 없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같은 과거사 경험을 공유한 중국과의 공조가 있지만, 중국은 위원국이 아니다.

이에 다음 방안으로 세계유산 등재 보고서에서 어떤 형식으로건 이들 산업유산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문구를 집어넣는 일이다. 현재로서는 우리 정부의 외교력 여하에 따라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나아가 그 다음으로 세계유산 등재 결정시 그 유산 제목에 시기를 특정해서 집어넣는 것도 있다. 예컨대 현재의 영문 명칭인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Kyushu·Yamaguch and Related Areas'를 '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Kyushu·Yamaguch and Related Areas, 1850~1910'과 같은 식으로 바꾸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 경우 강제 동원의 참상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시기를 명확히 한정함으로써 강제동원의 역사를 여전히 이면에 살아있게 하는 방식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위 세 가지 방식 중에서도 두 번째, 세 번째가 현실성이 있으며 개중에서도 세 번째가 가능하다고 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관련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가 없지는 않다. 비근한 사례로 남북한의 아리랑 등재를 들 수 있다.

한국은 2012년 아리랑을 애초에는 'Arirang, lyrical folk song'(아리랑, 서정민요)이라는 제목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하려 했지만, 중국 측의 반발로 그 명칭을 '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라고 해서 한국으로 한정했다. 이에 따라 북한 역시 지난해에 같은 아리랑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면서 'Arirang Folk so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리랑 민요)'라는 이름으로 올렸다.

우리 외교 당국이 얼마나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