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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영 칼럼] 대체 세금은 왜 내는가 송희영 주필

바람아님 2015. 5. 4. 14:21

(출처-조선일보 2015.05.02 송희영 주필)

'納稅가 국민의 의무'라는 건 돈 걷어서 제대로 쓰겠다는 국가 約束을 전제로 한 논리
근로소득자 절반 소득세 면제, 위정자는 허비하는 이 땅에서 '세금=약탈'로 인식되지 않겠나


	송희영 주필 사진

소득세는 영국에서 발명된 세금이다. 

18세기 말 영국은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잇따른 전쟁으로 재정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마부(馬夫)가 딸린 마차를 소유한 부자, 창문 숫자가 많은 대형 주택 보유자, 

거실에 기둥 시계를 갖고 있는 부유층을 상대로 소득세를 매기기 시작했다.

당시 시민혁명의 불길이 유럽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소득세를 도입한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영국 정부는 예산 편성부터 지출에 이르기까지 국회의 감시를 더 철저하게 받겠다고 약속했다. 

더 이상 소모적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소득세는 국가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겠다는 다짐을 받고서 만들어진 것이다.

영국인의 세금 철학은 소득세를 아예 원천징수당하는 우리 월급쟁이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국가가 수백년에 걸쳐 세금을 늘릴 때마다 재산권을 더 보호받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확장했다. 

납세자가 늘면서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 수도 점점 증가했다. 세금이란 정부가 재산권과 인간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대가로 

국민이 지불하는 비용이라는 의식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영국인에게 세금이 국민의 '권리'라면 독일인에게 납세는 '의무(義務)'이다. 

이런 세금 철학이 자리 잡은 배경은 산업혁명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였고 독일은 후발(後發) 공업국이었다. 

이웃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국가와 국민이 일심동체(一心同體)로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통치 논리가 먹혀들었다.

당대의 독일 철학자 헤겔도 개인이 돈벌이하거나 소비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은 국가가 만들어준다고 강조했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려면 모든 국민이 세금을 내 정부를 지탱해주어야 마땅하다는 의무 납세론은 그렇게 독일 국민에게 

침투했다. 기본권을 보장받는 대신 지불하는 협찬금 성격의 소득세는 100년 후 국민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 의무로 변질해 독일에서 부과되기 시작했다.

독일식 납세 의무론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수입됐다. 

우리 헌법은 38조에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고 했다. 

헌법 개론서들은 납세의무란 '국가의 통치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의무(김철수)'라거나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설정된 의무(성낙인)'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이 운명 공동체라는 전제 아래 '세금=의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납세의무를 무작정 강요할 수만은 없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우선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작년에는 드디어 월급쟁이 가운데 47%, 760만명이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았다. 

자영업자도 40% 안팎은 사업소득세를 한 푼 내지 않는다. 소득이 워낙 형편없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도적으로 의무를 기피하는 사람도 많다. 

이유야 어떻든 근로소득자 절반이 세금을 내지 않은 나라에서 납세가 모든 국민의 기본 의무라고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

의무 납세론은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제대로 쓰겠다는 약속 아래 만들어진 논리다. 

국민이 재정을 튼튼하게 떠받쳐주면 국가가 모두를 더 윤택한 환경에서 잘살게 해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야 

국민이 납세의무를 따른다는 말이다.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 비스마르크나 독일 지도자들은 당시 그런 꿈을 팔아 갈라진 나라를 통일했고 산업화를 앞당겼다. 

국민의 납세의무에 대한 답례로 독일은 세계 최초로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제도를 실행했다.

하지만 우리 정치인들을 보라.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공짜 급식, 공짜 보육에 수조원씩 세금을 듬뿍 지출했다가 결국 후퇴하거나 부실하게 만들었다. 

세금 수천억원을 써야 한다는 세월호 인양도 별 고민 없이 덥석 약속하고, 매일 세금 100억원을 넣어야 하는 공무원연금 

개혁도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고 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세금을 의무, 그것도 국민의 기본 의무라면서 그 의무를 착실하게 이행하는 국민을 맥 빠지게 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국민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고도 국가를 유지하는 비용을 국민에게 청구하는 것을 보면 뻔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세금은 빈곤층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는 좋은 정책 수단이다. 

세금을 잘 부과하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격차를 누그러뜨리며 정의(正義)를 실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부가 세금을 탕감받는 면제자를 양산하면서 세금을 아무 데나 펑펑 뿌리는 결정을 하게 되면 

납세자들은 자신이 낸 세금이 약탈당했다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대로 가면 세금이란, 권리도 의무도 아닌 약탈 대상이라는 한국형 세금 철학이 이 땅에 자리 잡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