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先경험, 後변화

바람아님 2015. 5. 8. 08:54

(출처-조선일보 2015.05.08 임병희 목수·'목수의 인문학' 저자)


	임병희 목수·'목수의 인문학' 저자 사진

공방에서 함께 일하는 목수 동료들이 내게 붙인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다. 
'선(先)제작 후(後)도면'이다. 
목수는 가구를 만들 때 먼저 도면부터 그려야 하는데 나는 서둘러 톱질부터 한다는 조롱이다. 
가구를 만들려면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생각이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가구도 탄생할 수 없다. 
머릿속에서 가구 모습을 결정하면 이제 그것을 도면으로 옮겨야 한다. 
나도 도면을 그리기는 한다. 하지만 정밀하지 않아 나중에 애를 먹을 때가 많다.

내가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박사 학위논문을 써 나간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논문을 쓸 때도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이 주제가 된다. 
내가 쓴 학위논문의 주제는 '한국의 신화역사(神話歷史)'였다. 
나는 한국의 신화가 역사가 되고 역사가 다시 신화가 되는 과정을 동북아 소수민족 신화와 비교 연구해 보여주고 싶었다. 
주제를 정하면 다음 순서는 목수가 도면을 그리듯 목차를 짜야 한다. 
그리고 목수가 재료를 준비하듯 참고 문헌을 읽어야 한다. 
하지만 목차라는 도면이 정밀하지 않아서 나는 논문을 쓰면서 쉽게 길을 잃었다. 몇 번이나 목차를 다시 짜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나는 조금 더 정밀하게 도면을 그리지 않은 것을 자주 후회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정밀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잘못된 도면과 목차를 고쳐 일을 진행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집을 피우며 잘못된 길을 계속 가는 것이다.

내가 만든 가구, 내가 쓴 논문을 보며 인생의 도면과 목차를 생각해 본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하고 그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인생은 가구나 논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도면이나 목차처럼 계획대로 되는 인생은 없다. 

그렇다면 도면과 목차를 고치고 바꾸듯 변화에 대처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목수가 된 것도 계획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두려워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삶에서 변화는 필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