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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정승 가려 뽑기, 복상(卜相)

바람아님 2015. 5. 27. 09:24

한국일보 2015-5-26

 

정승을 가려 뽑는 것을 복상(卜相)이라고 한다. 정승 자리가 비면 임금은 남은 정승들에게 후보를 추천하게 하는데, 국왕 자신은 추천권이 없었다. 다만 천거된 후보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짜를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대부분 검증된 인물을 천거하는 운용의 묘를 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숙종 13년(1687) 5월의 상황은 달랐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사면하자 숙종은 우의정 이단하(李端夏)를 좌의정으로 승진시키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우의정 후보의 복상을 명했다. 김수항과 이단하가 이숙(李?)을 추천하자 숙종이 퇴짜 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민서(李敏敍)를 추천했지만 다시 퇴짜 놓았다. 신정(申晸)과 여성제(呂聖齊)를 추천했지만 또 퇴짜를 놓았다. 그러자 김수항과 이단하는 숙종에게 의중의 인물이 있다고 생각해서 입대(入對)를 청했다.

숙종은 "이조판서 조사석(趙師錫)이 국사에 마음을 다했음을 내가 알고 있는데 여러 사람의 의견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임금이 직접 천거하는데 신하들이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숙종실록'은 조사석에 대해 "서인으로 부침하면서 (남인에게)용납되기를 바랐다"면서 서인이지만 남인과도 가깝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조사석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조정에 큰 물의가 일었다. 우의정 조사석도 사직하는 차자를 다섯 번이나 올려서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물의가 인 까닭은 단지 임금이 직접 천거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사건 직후 효종의 딸이자 숙종의 고모인 숙안(淑安)ㆍ숙명(淑明) 공주가 입궐했다. 숙안 공주는 효종의 둘째 딸이지만 언니 숙신 공주가 2살 때 사망해서 사실상 효종의 장녀였고, 또 숙종의 부왕인 현종의 누나였다. 효종의 셋째 딸인 숙명 공주는 조사석이 정승이 되었다는 숙종의 설명에 "그 사람이 재주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의아해했고, 숙안 공주는 "조사석이 좋은 명정(銘旌)감을 얻게 되었습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명정이란 장례 때 품계 등을 기록해서 관 앞에 세우는 기이다.

드디어 그 해 9월 지경연사(知經筵事) 김만중(金萬重)이 숙종에게 "후궁 장씨의 어미가 평소 조사석의 집과 친밀했습니다. 대배(大拜ㆍ정승 제수)가 이 길에 연줄을 댄 것이라고 온 나라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데 유독 전하만 듣지 못하고 계십니다"('숙종실록' 13년 9월 11일)라고 직설했다. 후궁 장씨(장희빈)의 청탁으로 정승이 됐다는 비판이었다. 숙종은 "내가 금이나 은을 받았다는 말이냐. 말의 근거를 대라.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라고 크게 화를 냈지만 퍼져가는 소문은 어쩔 수 없었다.

서인 대신과 공주들이 반발한 것은 그 배후에 남인들이 숙종에게 접근시킨 장희빈의 미인계가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숙종은 암탉이 먼저 운다는 뜻의 '빈계사신(牝鷄司晨)'이라는 성어까지 써가면서 고모(공주)들의 국정 관여를 비판했지만 후궁 장씨를 국정 한 가운데에 끌어들인 것은 숙종 자신이었다. 이때 숙종이 고모인 두 공주를 빗대 "어찌 앙화(殃禍ㆍ재난)가 없겠는가"라고 보복을 시사하자 새로 영의정이 된 남구만은 "선왕(先王)의 동기가 이 몇 사람뿐이니 과실이 있어도 은덕이 의리를 덮는 도리를 생각하소서"라고 말렸다.

그러나 숙종은 2년 후인 재위 15년(1689) 정권을 남인에게 넘긴 후 숙안 공주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홍치상(洪致祥)을 '후궁 덕분에 정승이 되었다'는 말을 퍼뜨린 주범으로 교수형 시켰다. 상례를 어긋난 정승 임명이 사촌의 목숨을 빼앗는 비극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서인들이 정승을 독차지하는 정치지형을 바꾸고자 했으면 남인 정승을 임명하는 '탕평책'을 표방해 풀었어야지 후궁의 사주라는 사심(私心)으로 국가대사를 결정할 것은 아니었다.

황교안 총리 후보자의 적격성 여부를 놓고 사회가 다시 술렁이고 있다. 병역의무 미이행, 16개월에 15억원의 고액 수임료,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화 역정 폄하, "4·19혁명은 혼란, 5·16군사쿠데타는 혁명"이란 반역사적 사고, 극심한 종교편향성 등 그 어느 하나 대한민국이 지금의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야 하는 정상국가의 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총리 후보자의 잇단 낙마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듯하다. 국민들이 '부족하지만 그 정도면 됐다'고 할 사람 찾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그래도 우매한 백성들은 지지할 것이라는 자만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행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