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횡설수설/홍찬식]'비극의 나라' 그리스

바람아님 2015. 7. 5. 10:26

동아일보 2015-7-4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유명하지만 서양 연극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 연극 하면 단연 비극을 꼽는다. 주인공의 슬픈 운명에 연신 눈시울을 적시는 연극 말이다. 고대 그리스는 해마다 3월에 비극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를 통해 그리스 3대 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배출됐다. 이 중 소포클레스는 23회의 우승 경력을 자랑한다. 모두 기원전 5, 6세기 사람들이다.

 

▷그리스 비극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권력자들이다. 이들은 질투와 원한, 방종과 과욕으로 파멸에 이른다. 당시 연극은 도시 전체가 들썩거리는 인기 행사였다. 국가가 모든 경비를 대고 ‘코라구스’라는 후원자가 또 큰돈을 지원했다. 기득권층 주도의 행사에서 권력의 몰락을 그린 작품들이 공연된 것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높은 수준을 말해준다. 그리스 비극이 성행한 기원전 5세기 이후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비극은 번영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풍요의 산물이었다.

 

▷국가부도를 당한 그리스가 애처로울 정도로 휘청거리고 있다. 외국과의 거래가 끊겨 수입 생필품은 바닥이 났고 대중교통은 운행 횟수를 줄였다. 먹을 게 없어 밤늦게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도 목격된다. 국민투표를 앞두고 사회는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해외로 재산을 빼돌린 부유층은 남의 일처럼 무관심하다. 선구적으로 민주주의를 일구고 불멸의 문화를 창조한 그 현자(賢者)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고대 그리스는 직접 민주주의를 도입한 나라였으나 연극 대회에서 우승 작품을 고르는 데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맡기지 않고 추첨을 통해 뽑힌 소수의 전문가들이 심사하도록 했다. 인기보다는 냉정한 판단이 훌륭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스 위기는 정치가 할 일 안 할 일 가리지 않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빚어진 실패다. 민주주의가 초심을 잃고 타락하면 그 종착점은 어디인지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성지(聖地)에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