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편안히 떠난 義人

바람아님 2015. 7. 7. 08:06

(출처-조선일보 2015.07.07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소설가 박완서가 암과 싸우는 화가 친구의 문병을 갔다. 

친구가 세상을 뜨기 엿새 전이었다. 친구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곁에 잠든 어린 손자의 발바닥을 보며 미소 지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의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예뻤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지려는 고목이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그 고목은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


▶죽음은 삶의 일부이자 과정이라고들 말한다. 

장자(莊子)도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두려울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삶을 평화롭게 마무리하기란 쉽지 않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학(學)의 고전 '죽음과 죽어감'에서 임종에 이르는 다섯 단계를 말했다. 

죽음을 거부하는 부정(否定)으로 시작해 분노·타협·절망을 거쳐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受容)까지다. 

그래서 의학자 셔윈 누랜드는 '죽어가는 사람을 외롭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만물상 칼럼 일러스트

세월호 의인(義人) 김홍경씨는 분노와 절망 속에 쓸쓸히 떠날 뻔했다. 

그는 세월호가 왼쪽으로 기울었을 때 맨 위 5층 오른쪽 끝방에 있었다. 

가장 쉽게 탈출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에야 배를 떠났다. 

그는 구명조끼 몇십 벌을 아래층 단원고 학생들에게 던져줬다. 

커튼을 찢고 소방 호스를 풀어 만든 밧줄로 스무 명 넘게 끌어올렸다. 

배관 기술자인 그는 배에 실었던 승합차와 장비를 잃었다. 

몇 달을 불면증에 시달리다 작년 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 왔다.


▶정부는 "피해 본 건 모두 보상해주겠다"더니 1년 뒤에야 승합차 값으로 53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민간단체 상(賞)도 사양했던 그가 "세상 끝에 내몰리니 한국에선 목소리가 커야 하는 것 아닌지 후회된다"고 했다. 

지난달 조선일보가 김씨의 처지를 보도한 뒤로 그는 서운함을 덜었다. 

시민 100여명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그가 입원했던 국립암센터가 돕겠다고 나섰다.


▶그는 "무관심 속에 죽어가다 일어서게 됐다. 한국은 아직 살 만한 나라"라고 했다. 

"병을 이겨내 성원에 보답하겠다"던 그가 지난주 숨을 거뒀다. 

부인은 "도와주신 분들께 남편이 마지막까지 감사하며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편안한 죽음은 세상과 화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온다. 

퀴블러 로스는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사람의 모습은 별이 스러지는 것 같다'고 했다. 

김홍경씨도 별이 스러지듯 미소 지으며 떠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