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세계포럼] 화폐를 바꿔라

바람아님 2015. 9. 10. 08:08
세계일보 2015-9-9

돈은 그 나라의 힘과 경제 위상을 반영한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힘이 미국의 국력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대로 돈의 가치가 땅바닥이라면 그 나라의 국력이나 경제 위상도 호평을 받기 어렵다. 세계 각국이 자국 화폐의 가치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80년대 경제가 벼랑 아래로 떨어졌던 볼리비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인플레이션으로 통화가치가 급락하자 회사에서 상자에 돈을 가득 담아 월급을 주었다. 어느 대학에선 돈다발을 길이로 재서 지급했다. 교수는 50㎝쯤 받았고, 비서는 그 절반쯤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돈다발을 들고 시장에 가도 살 만한 물건이 없었다. 이런 볼리비아조차도 지금은 우리보다 화폐가치가 높다. 우리 돈 1000원을 내면 그곳 화폐 6불리비아노를 바꾸기 힘들다.


배연국 논설위원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서 세계 13등이지만 화폐가치의 순위로는 200등에 가깝다. 해외여행을 해보면 원화의 위상을 절감한다. 주요 20개국(G20) 중에서 우리보다 화폐가치가 낮은 나라는 인도네시아 한 곳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선 34개국 중 34등이다. 굳이 선진국과 견줄 필요도 없다. 아프리카 나라 수준에도 못 미치는 화폐가치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 돈보다 케냐는 11배, 수단은 190배, 리비아는 800배나 가치가 높다. 경제대국 한국의 위상에 맞게 조속히 화폐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

화폐를 바꿔야 하는 이유는 비단 원화의 체면치레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물가상승이 있었지만 화폐 개혁에는 50년 넘게 손도 대지 않았다. 1962년에 10환을 1원으로 바꾼 것이 가장 최근의 일이다. 그로 인해 화폐와 경제현실 간에 괴리현상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화폐가치 추락에 따른 불편과 폐해는 생활 곳곳에서 나타난다. 정부 당국자만 그런 사정에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국민들이 스스로 자구책 마련에 나섰겠는가. 시내 레스토랑이나 카페에는 1000원 단위의 0을 생략한 채 가격을 표시한 곳이 적지 않다. 기업 역시 회계자료에서 0 줄이기에 나선 지 오래다. 이미 생활 속에서 화폐단위를 낮추는 ‘리디노미네이션’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훨씬 많다. 국내 금융시장에서 연간 결제되는 규모는 6경(京)원을 넘어선 상황이다. 0을 3개만 떼어내도 회계처리나 통계 작성이 간편해지고, 각종 결제 과정에서 국민의 불편을 크게 덜 수 있다. 신구 화폐를 바꾸면 지하로 퇴장한 현금을 양성화해 세수를 늘리는 부수효과도 있다. 이런 이유로 2003년 노무현정부 시절에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주창했다. 하지만 그의 일성은 물가상승과 비용부담을 우려한 청와대의 반대로 결국 잦아들고 말았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9개월째 0%대를 맴돈다. 소비 진작을 위해 오히려 인플레이션에 불을 지펴야 하는 처지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화폐단위를 낮추면 소비자들의 착시효과로 소비심리가 일어날 수 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안성맞춤 정책인 셈이다. 박 전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우리 경제가 반드시 해야 할 숙제다. 물가상승률이 낮아 인플레이션 우려가 없는 만큼 지금 단행하면 경기부양의 효과까지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정부는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4대 개혁을 추진 중이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자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의 개혁은 화폐를 포함한 5대 개혁으로 확장돼야 한다. 후진국보다 100배, 1000배의 돈을 더 내야 하는 작금의 처지로는 나라 위신이 제대로 설 수 없다. 아프리카 케냐, 리비아보다 못한 화폐가치를 언제까지 방치할 셈인가.

화폐 개혁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지금이 바로 적기다. 천재일우의 기회는 한 번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