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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빈 잔' 최경주

바람아님 2015. 10. 22. 07:55

(출처-조선일보 2015.10.22 민학수 논설위원·스포츠부 차장)

프로골퍼 최경주가 두툼한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한 곡 뽑았다. 
"그대의 싸늘한 눈가에 보이는 이슬이 아름다워…." 검게 탄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하며 부르는 
구성진 노래에 신바람이 번진다. 남진이 부른 '빈 잔'은 그의 애창곡이다. 청혼할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 
그는 마지막 부분이 정말 좋다고 했다. 
"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 그대여 나머지 설움은 나의 빈 잔에 채워주…."

▶엊그제 최경주재단 자선 골프대회 후원의 밤에서 최경주가 '빈 잔'을 불렀다. 
턱시도를 차려입고 최경주재단 장학생인 김성욱군이 지휘한 오케스트라 현악 선율에 맞췄다. 
그에게 후원 행사 참석자들은 고마운 분들이다. 
그래서 연습까지 하고 200여 귀인 앞에 섰다고 했다. 그 동영상이 트위터를 타고 세계에 퍼졌다.

[만물상] '빈 잔' 최경주
▶미국 잡지 골프다이제스트는 "최경주의 재능 목록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역도 선수에서, 8승을 올린 대단한 골퍼로, 이제는 한국의 토니 베넷이 되려 한다"고 익살을 부렸다. 
베넷은 감미롭게 노래하는 미국 원로 가수다. 완도 섬마을 출신인 최경주는 어려서 카센터 사장이 꿈이었다. 
타고난 장사(壯士)여서 중학교 때 역도부원을 하다 그만뒀다.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 따자고 마음먹었는데 팔이 길어서 불리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들어가서야 배운 골프가 천직이 됐다.

▶그는 한국 투어 시절 우승 소감으로 "방귀가 잦으면 Ⅹ이 나온다"고 해 사람들을 웃겼다. 
대학 나온 아내와 인터뷰 연습을 해 나중엔 적절한 어휘를 골라 쓰는 인터뷰의 달인이 됐다. 
"영어만 잘했으면 미국 사람들도 들었다 놨다 했을 텐데"라고도 했다. 
2000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에 갔을 때 할 줄 아는 영어는 '생큐(thank you)' 한마디. 
욕을 해도 못 알아듣고 "생큐"라며 씩 웃었다. 
그는 팬에게 가장 친절한 선수로 꼽힌다.

▶최경주는 자선에도 손이 크다. 2007년 최경주재단을 만든 이래 54억원을 기부했다. 
그 전 기부금까지 합치면 100억원에 이른다. 미국 기자들이 대표적 자선 골퍼에게 주는 상도 받았다. 
그  는 매년 후원하는 골프 꿈나무들과 함께 전지훈련을 간다. 
"애들한테 모범을 보이려고 행동하다 보니 내가 더 배운다"고 했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한 번 계약에 몇십억원을 받는 스포츠 부자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해외 원정 도박과 승부 조작이 끊이지 않는다. 
"자신을 비워야 더 소중한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최경주의 '빈 잔 철학'이 더욱 돋보이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