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여행 가방 꾸리기

바람아님 2015. 11. 13. 18:14

(출처-조선일보 2015.11.12 신수진·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신수진·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사진출장 전날이다. 
가방을 펼쳐 놓고 물건들을 습관적으로 던져 넣다가 문득 이 많은 짐이 꼭 필요할까 스스로 묻게 됐다. 
고민의 순간이다. 출장 중 늘어날 묵직한 자료와 책을 생각하니 출발부터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나서는 게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필요할지 모르는 비상약이며 옷가지를 모두 덜어내자니 
살짝 불안해진다. 아, 짐 싸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데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짐 하나 꾸리는 데도 이렇게 노선이 분명치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엉뚱한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문득 지난해 이맘때 출장지에서 만난 변호사가 생각났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에게 짐 싸는 노하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욕심을 버리고 꼭 필요한 물건을 추려내는 일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요한 물건을 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기 위해' 시간을 쓴다는 얘기였다. 
나의 커다란 가방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쌌을 그의 가뿐한 가방이 철학자의 가방처럼 비범하게 보였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더 가지기 위한 노력은 누구나 하지만 덜 가지기 위한 고민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끌어안고 살기보다 덜어내면서 살기가 훨씬 어렵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무소유를 논할 순  없다. 원론을 말할 순 있겠으나 실천이 어렵다. 
그렇다고 무한정 늘어나는 물건에 집착하고 그 모든 걸 열정적으로 관리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달려가기엔 
인생은 너무 짧고 내 가방은 너무 작다. 
가벼움이 주는 자유와 무거움이 주는 안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내 자리를 찾아야 한다. 
무엇을 덜어낼지 진중하게 고민하고 나면 남은 것이 더 소중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