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태평로] 이번 不況, 태풍이 아니라 장마다

바람아님 2015. 12. 22. 06:58

(출처-조선일보 2015.12.22 김태근 논설위원)


김태근 논설위원외환 위기를 겪은 세대라면 마크 워커라는 이름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 외채협상단의 법률고문으로 정부에 자신의 월가 인맥을 소개해주며 부채관리 방안을 
조언했다. 그 덕에 우리는 당시 250억달러에 달했던 단기외채 상환을 미룰 수 있었다. 1998년 2월 
정부는 그에게 수교훈장 흥인장(2등급)을 줬다. 경제국치(國恥)를 겪은 우리에겐 고마운 사람이다.

그가 17년 만에 한국에 다시 왔다. 이번엔 현대상선 구조조정을 돕기 위해서다. 
해운업은 선주에게 배를 빌려 화물을 실어 날라 돈을 버는데 불황으로 운반료가 폭락하면서 현대상선이 
번 돈보다 배를 빌리는 돈(용선료)이 한 해 2000억원 이상 많아졌다고 한다. 
이대로는 경영이 어렵고 회사를 살리려면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워커씨는 채권단인 산업은행에 채무 탕감을 요청하고, 해외 선주들에겐 용선료를 깎아달라고 협상을 벌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산은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대우조선해양에 7조원 가까운 퍼주기를 했으니 또 다른 기업을 거론하기조차 싫은 모양이다. 
정부도 심각한 해운업 구조조정 문제를 최근 몇 차례 청와대 서별관회의(비공개경제금융점검회의)에서 의논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대로 둘 수 없는 기업을 눈앞에 두고 다들 우물쭈물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내년 경제정책 방향에 
'메이드 인(in) 코리아'에서 '메이드 바이(by) 코리아'로의 정책 전환 방침을 담으려다 취소했다. 
수익성이 떨어진 기업을 저렴한 노동력과 값싼 공장이 있는 해외로 보내 경쟁력을 되살려보자는 취지였다는데 
"기업이 떠나 일자리가 줄면 누가 책임질 거냐"는 반대에 밀렸다. 
20년 전 일본에선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제조업 매출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하자 기업을 해외로 보내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바로 우리와 같은 "기업이 없으면 일자리도 없다"는 산업공동화(空洞化)론에 일본 기업들은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후 소니, 파나소닉 같은 세계 최고 기업들이 이류로 전락했다.

가격 경쟁력이 사라진 범용 제조 기업이 세계 최고 자리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부장은 그래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제조업 탓"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말 일자리를 늘리고 싶다면 제조업은 해외에서 활로를 찾게 하고 이들을 내보낸 자리에 연구개발, 서비스 같은 
고부가가치 기업들이 새싹을 틔워야 한다"고 했다.

몇 년 새 대한민국 경제의 화두(話頭)는 경제민주화, 창조경제, 재벌 개혁으로 옮겨왔다. 
주장하는 사람과 관점은 달라도 근저(根底)에 흐르는 문제의식은 같다. 
우리 기업 생태계를 이대로 두고는 나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권과 정부, 금융계에서 말만 무성한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많은 전문가가 과도한 비관을 경계하며 외환 위기 같은 충격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사흘 전 무디스도 우리나라 신용 등급을 사상 최고 등급에 올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앞에 두고 있는 불황은 과거처럼 잠시 몰아치다 사라질 태풍이 아니다. 
속도는 느려도 몇년간 이어질지 모를 장마와 같다. 
절벽에서 추락하든 내리막길로 걸어가든 뻔히 보이는 위험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으면 도착할 곳은 바닥뿐이다. 
지금 기업들을 이대로 둘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