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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우 나라’ 자처했던 일본 오키나와(流球國)

바람아님 2016. 1. 16. 00:23
⊙ 인조 때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태자가 살해된 후 관계 끊겨
⊙ 임진왜란 후에는 일본에 대한 정보 제공 약속하기도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류큐왕국의 왕성 슈리성으로 가는 길. 류큐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관광객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돈을 받는다. 성 입구에 중국이 류큐왕국을 일컫던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자국의 섬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는 그들의 침략 근성에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후 해외 침략에 나섰다. 제일 먼저 영토화한 것은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流球國)이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침탈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유구국은 고려·조선 그리고 중국 명(明)나라와 교분을 돈독히 해 온 소왕국(小王國)이었다. 그들은 자주 사신(使臣)과 예물(禮物)을 명(明)과 조선에 보내서 친분을 쌓았다.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 관계 기록인 《고사촬요(攷事撮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고사촬요》는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이 저술하기 시작해서 대대로 조정 신하들이 기록해 나간 사료(史料)였다.
 
  〈병오(丙午・조선 선조재위 39년) 4월에 유구국 중산왕(中山王) 세자(世子) 상녕(尙寧)이 자문(咨文·조선 시대 외교적인 교섭·통보·조회할 일이 있을 때에 주고받던 공식적인 외교문서)을 보냈으니 그 자문에 “거듭 후한 예의를 보답하려 합니다. 왜국(倭國)의 관백(關白)이 패역(悖逆·인륜에 어긋난 행패)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하여 귀신이나 사람이 모두 분하게 여겼는데 하늘이 교만한 오랑캐(일본)를 망하게 하여 해내(海內·사방이 바다인 곳)가 모두 좋아 날뛰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천조(天朝·명나라를 칭한 것)의 신무(神武·뛰어난 무술)가 크게 떨쳤고 귀국(조선)의 위령(慰靈·영혼)이 다시 강하여져서 여얼(餘孼·아주 망한 사람의 자손)을 이미 죽여 없앴고 하여 추한 오랑캐 놈들 모두가 넋을 잃고 담이 떨어지지 않는 놈이 없었습니다. 이다음에 어찌 자기 자신의 힘을 생각하지 않는 관백이 있겠습니까. 간혹 패역이 다시 나타나고 하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번봉(藩封·종속관계라는 것)에 있고 귀국(조선)과는 정의(情誼)가 우방(友邦)관계에 있으니 우리 스스로가 계책을 가지고 그들 왜인을 정탐해서 천조(天朝)와 귀국에 전하도록 하겠으니 깊이 염려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유구 사신이 말한 3가지 壯觀
 
남중국해에 있는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때 독립왕국을 이루었으나, 결국 일본에 합병되었다.
  이 자문은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보내 온 것이었다. 이와 함께 견제품(絹製品)인 비단 물목(物目)들도 보내 왔다고 한다. 광해군 때 유구국에서 보내 온 자문도 있었다. 광해군 재위 첫해에 보내 온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기유년(己酉年·재위 원년)에 유구국 중산왕이 자문을 보냈는데 “우리나라와 귀국(조선)이 비록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똑같이 천조(명나라)에 대하여 신(臣)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모두 천지(天地) 안에 있어서 마음으로 서로 사귀고 정신으로 서로 통하고 하여 돈독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문안(問安)을 하는 일도 끊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저희 나라가 무엇을 잘하여 귀국으로부터 훌륭한 대우를 받아 왔겠습니까. 저희가 근년에 천조로부터 관복(冠服)을 받고 왕작(王爵·왕 칭호)을 그대로 봉해 주시는 은혜도 입었고 하여 비로소 귀국(조선)과 형제의 의(誼)를 맺게 되었고 같이 천조의 번복(藩服·하사받은 옷)으로서 고굉(股肱·팔과 다리)의 신하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이후로는 길이 동맹을 맺어 귀국은 형이 되고 저희 나라는 아우가 되어 형제국으로 천조를 섬기고 즐겁게 화목과 예로 방문하고 해서 영구히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그리고 물목으로 각종 베(피륙), 비단, 건선(建扇·부채) 등을 보내 왔다.〉
 
  이에 앞서 9대 성종 재위 때 유구국 사신이 온 기록도 있다. 조선 중기 때 인물 성현(成俔)의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성종 정유년(丁酉年·재위 8년)에 유구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니 임금께서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접견을 하였다. 그 사신이 물러나 관사(官舍)에 와서 통사(通事·통역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국에 와서 세 가지 장관(壯觀)을 보았다”라고 하니 통사가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신이 대답하기를 “경회루 돌기둥이 그 한 가지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공의 풍채(風采)가 준수(俊秀)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온 것이 그 두 가지요, 예빈정(禮賓正·외국 사신을 담당하는 수장, 정3품)이 잔치할 때마다 아주 큰 잔에 술을 마음대로 마구 마시면서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하였다. 그때 이숙문(李叔文)이 예빈부정(禮賓副正·종3품)이 되었는데 그 말이 몹시 우스워 배를 안고 웃었다.〉
 
 
  벼슬·姓 등 조선·중국과 유사
 
  조선 성종 때 문신(文臣) 최부(崔溥)가 중국에 표류(漂流)해 갔을 때의 기록을 왕명으로 적은 책인 《표해록(漂海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바다에 표류되어 북경(北京)에 갔었다. 그때 유구국의 사신 정의대부(正義大夫) 정붕(程鵬) 등이 와서 뒤편 관사(官舍)에 들어 있었는데 그와 함께 온 사람인 진선(陳善), 채새(蔡賽), 왕충(王忠) 등이 떡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므로 최부가 손을 내저으며 받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나라 임금이 20년 전에 우리 아버지를 보내어 귀국(유구국)에 갔을 때 대인(大人·남의 어른 존칭)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므로 항상 그 은정(恩情)을 생각해 왔는데 지금 공(公)과 서로 보게 되는 것만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 내용에서 볼 때 유구국 사람들은 왜인과 다르게 대부(大夫)라는 중국식 호칭의 관직이 있었고, 성(姓)도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은혜를 알고 정의(情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돌려보내기도
 
  《고려사》의 창왕(昌王)편에도 유구국 관련 기록이 있다.
 
  〈유구국 중산왕 찰도(察度)가 옥지(玉之)를 파견하여 글을 올려 신하로 자칭하였다. 그리고 왜적에게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귀환시키고 그 지방의 산물인 유황 300근, 소목(蘇木·약재로 쓸 수 있는 다목의 붉은 속살) 600근, 호초(胡椒·후추나무 열매의 껍질 가루로 만든 것) 300근, 갑옷 20벌을 바쳤다. 이에 앞서서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유구국 국왕이 우리나라에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보내 온 사신이 순천부(順天府)에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였을 때 도당(都堂·의정부)에서는 이에 대하여 전대(前代)부터 오지 않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사신 접대에 난색을 보였다. 그런데 창왕이 말하기를 “먼 곳에서 조공하러 온 사람을 박대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은가? 서울로 오라 하여 위로한 후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였다. 그래서 전판서(前判書) 진의귀(陳義貴)를 영접사로 임명하였다.〉
 
  고려 창왕 때 기사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전객령(典客令·사신을 영접하는 관청의 수장 벼슬) 김윤후(金允厚), 부령(副令) 김인용(金仁用)을 유구국에 답례사로 보냈다. 여기에 회답한 글에 “고려의 권서국왕(權署國王·국왕의 권한을 가졌다는 표현) 창(昌)은 삼가 유구국 중산왕에게 답서를 보내는바, 우리나라와 귀국과의 사이에는 넓은 바다가 가로막혀 있어서 일찍이 왕래를 못하였으나 말은 들었고 생각을 한지 오래였다. 이번에 일부러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귀한 물건까지 보내 주었으니 또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송환하여 주니 고맙고 기쁜 심정인 것을 이루 말로 다하기 어렵다. 다만 귀국의 사신을 만족하게 접대치 못하여 매우 섭섭하게 되었다. 이제 전객령 김윤후 등을 파견하여 약간의 물건을 보냄으로써 본인의 뜻을 표하니 받아 주기 바란다.〉
 
  ‘포로가 된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가 바다에서 항해 중 표류한 사람이나, 왜구에게 붙잡혀 간 고려인을 말하는 것이다.
 
  유구국이 소왕국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일본 본토 서남단 지역의 해상이다. 중국으로 오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표류한 사람들이 유구국에 닿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유구국의 배가 중국으로 갈 때 역시 표류해서 제주도 근해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에는 김윤후가 유구국으로 가서 돌아올 때 고려인 37명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도 있었다. 고려나 조선에서는 유구국왕을 중산왕(中山王)이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표류자 서로 돌려보내
 
  조선 영조 때 예조정랑(禮曹正郞·국가의식과 외교관계를 맡은 관청인 예조의 정5품) 이맹휴(李盟休)가 편찬한 《춘관지(春官志)》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인조 무진년(戊辰年·재위 6년)에 유구국 중산왕 상풍(尙豊)이 우리나라에서 북경에 가는 사신 편을 이용하여 자문(咨文)과 예폐(禮幣)를 보내 왔으니 그 자문에 대(代)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는 말을 하고 또 그 나라에서 표류해 온 사람 임자정(林子政) 등을 돌려보내 준 것을 사례하였다.〉
 
  예폐는 고마움과 공경하는 뜻으로 보낸 예물을 말한다. 《춘관지》에는 또 이런 기사가 있다.
 
  〈인조 말년에 유구국의 태자(太子)가 표류되어 제주도에 왔는데 그곳을 지키고 있던 관리에게 살해를 당하니 그 뒤부터 왕래가 끊어졌다.〉
 
  유구국과의 교린은 이 사건에서 끝난 듯, 이후 유구국에 관한 기사들은 사라진다.
 
  유구국은 몇 개의 부족집단이 뭉쳐서 1429년에 통일왕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다가 1609년 일본 사쓰마번(薩摩蕃)의 침략을 받아 일본의 영향하에 들어갔다. 메이지유신 후인 1879년 강제로 일본의 오키나와현(縣)으로 편입되었다. 유구국은 중국 명(明)나라의 문물제도를 따르며 계속 사대교린(事大交隣)을 해 왔다. 또 조선과 돈독한 우호를 유지했다. 일본의 동정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침략했던 일본 본토나 구주(九州), 대마도(對馬島)의 왜인들과는 달랐다.
 
  우리의 역사 기록에 보면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왜국의 침략이 많았다. 조선 숙종 때 유수원(柳壽垣)이 쓴 《우서(迂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왜인이 우리나라에 근심이 된 것은 신라·고려 때부터 벌써 그러했는데 고려 말기에 와서 더욱 심하였으니 대개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들이었다. 조선에 와 태조가 재위에서 왜인들로부터 근심이 별안간 없어졌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는데 300여 년 만에 단지 명종(明宗) 때 삼포(三浦)의 난리와 선조 때 수길(秀吉)의 임진년(壬辰年) 난리가 있었을 뿐이다. 임진년 뒤에 왜국은 원씨(源氏)가 지금까지 다스리자 난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 나라에서 난리를 일으키는 자가 없어서 도망 다니는 왜인도 없고 하여 우리나라에 침범해 오지 않았으니 근고(近古)에 없었던 일이다. 왜놈들의 성질이 불똥이 튀는 것 같아서 100년 동안이나 아무 일 없이 지낼 턱이 없는데 이렇듯 오래도록 태평하게 지내니 이런 왜인들을 보면 우리 조선이 하늘의 도움을 받은 바가 되었으니 왜국 침입을 자주 받은 신라와 고려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센카쿠 혹은 댜오위다오
 
  일본은 걸핏하면 지금의 경남 지역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면서, 우리의 삼한시대 이전의 변진(弁辰)에 왜국의 세력이 한반도에 진출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일본인들이 그들의 본토와 가까운 여러 섬들을 그냥두었을 리는 만무하였다. 유구국이 일본에 합병된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오늘날 오키나와, 즉 유구열도(流球列島)에서 보다 더 남쪽 아래 있는 섬들이 일본어로 센카쿠(尖閣)열도, 중국어로 댜오위다오(釣魚島)다. 이 섬을 두고 중국과 일본이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독도도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영유권 주장은 지독하게 끈질기다. 이는 그들의 선대(先代)부터 이어져 온 침략근성의 발로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 당국은 오히려 맞대응을 자제한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영토로 독도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독도에다 입도(入島)센터를 건립하려다가 잠시 동안인지 영구인지 중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일본은 중국이 센카쿠 상공에 항공기를 띄우자 지체 없이 전투기를 급발진시켰다. 일본의 이러한 강력 대응에서 그들 선대의 근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은 중국에 비해 작은 나라다. 그렇지만 맞대응하는 정도의 강한 면이 있다. 이런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나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 ‘이웃나라보다 우리 국가가 우선’이라 하는 국가관(國家觀)이 확립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고려와 조선의 역사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하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독도를 넘보는 일본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라면, 우리 스스로가 약소국가(弱小國家)임을 자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의 우경화(右傾化)나 혐한(嫌韓) 행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말을 못해서는 안 된다.
 
  삼국시대 신라도 작은 나라였다. 하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동맹국 당(唐)나라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자, 이에 맞서 싸워 그들을 몰아냈다. 그러한 신라의 지혜와 용기를 우리도 배워야 할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등록일 : 2016-01-15 13:22   |  수정일 : 2016-01-15 1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