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經濟(內,外)

['경제 제재' 풀린 이란] [下] 이란 건설 진출 최대의 敵, 코리안 집안 싸움

바람아님 2016. 1. 28. 10:52
조선일보 : 2016.01.27 03:06

['경제 제재' 풀린 이란] [下]국내기업끼리 저가 수주 경쟁… '묻지마 영업' 나서 수천억원 적자

이란, 年1000억달러 황금시장… 전세계 기업 앞다퉈 지사 설립
한국, 공동 수주로 출혈 막고 정책 금융기관 통해 조율해야


지난달 13일 이란 테헤란 도심의 국제 상설 전시장에선 제12회 이란 석유화학 포럼이 열렸다. 이란 국영 석유 회사(NPC)가 주최한 이 행사에는 세계 각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인맥을 쌓고자 찾아온 기업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란 현지 기업은 물론 유럽·미국·아시아 등에서 14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재형 대림산업 테헤란지사장은 "1년 전만 해도 썰렁했던 테헤란 거리에 작년 말부터 외국인이 넘쳐나고 있다"며 "테헤란에서 동·서양 건설사들의 소리 없는 수주 전쟁이 뜨겁다"고 말했다.

대림산업이 2009년 완공한 이란 남부‘사우스 파’가스전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가스 탱크 내부에 들어가 용접 작업을 하고 있다.
대림산업이 2009년 완공한 이란 남부‘사우스 파’가스전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가스 탱크 내부에 들어가 용접 작업을 하고 있다. 1975년 첫 진출 이후 이란에서만 120억달러 규모의 공사를 따냈던 한국 건설사들은 최근 빗장이 풀린 이란 시장에 다시 뛰어들고 있다. /대림산업 제공
이달 16일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가 풀린 '황금의 땅' 이란을 선점하기 위해 전 세계 건설사들이 몰려들고 있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이란은 경제 재건을 위해 연간 최대 1000억달러가 넘는 각종 인프라 공사를 쏟아낼 예정이다. 이는 중동 최대 건설 시장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맞먹는 규모다. 국제 유가 하락으로 중동시장 전체가 쪼그라든 상황에서 이란이 글로벌 건설업계에 새로운 시장으로 뜨고 있다.

◇"코리안 시리즈 되풀이되면 共滅한다"

한국 건설 기업에도 이란은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이다. 국내 주택 경기 호황이 주춤해지고 다른 해외 건설 시장도 모두 위축된 탓이다. 실제 지난해 해외 건설 수주액(461억달러)은 2007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특히 중동 지역 수주액(165억달러)은 전년 대비 반 토막 났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건설사들도 이란 시장 진출 재개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경제 제재 기간에도 테헤란 지사를 운영했던 대림산업은 현재 직원 5명이 발주처 동향을 파악하느라 분주하다. 현대건설은 지난달부터 지사장과 직원 3명을 현지에 급파해 수주 작업에 착수했다. GS건설과 대우건설도 최근 이란 지사를 다시 열고 영업 인력을 배치했다.

하지만 이란의 한국 건설사 움직임에 우려 목소리도 나온다. 과거 고(高)유가 시기에 중동에서 쏟아지는 물량을 놓고 한국 건설사끼리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과당 경쟁을 벌여 큰 후유증을 겪었던 탓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2년 사이 중동·동남아 등에서 한국 건설사들은 원가(原價)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저가에 서로 공사를 수주하겠다며 출혈(出血) 경쟁을 벌였다. 해외 건설사들은 이를 가리켜 '코리안 시리즈'라고 비아냥거렸다.

국내 건설업계 중동·이란 신규 공사 수주액 외
2009년 발주된 카타르의 하수 종말 처리장 공사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국 대형 건설사 A 사는 발주처로부터 우선 협상 대상자로 지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B사가 "공사를 더 싸게 해주겠다"며 뒤늦게 수주전에 뛰어들면서 일이 꼬였다. A사 관계자는 "발주처가 우리와 B사에 계속 공사비를 깎으라고 요구해 결국 두 회사 모두 사업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2011년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형 플랜트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도 비슷한 사례가 연출됐다. 당시 한국의 C사가 심사를 거쳐 1순위로 낙찰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종 낙찰 업체는 예상을 깨고 D사로 결정됐다. 업계에선 D사가 C사 오너 일가와 관련한 과거 검찰 수사 관련 한국어 기사를 아랍어로 번역해 발주처에 들고 가 "이런 회사에 공사를 주면 안 된다"고 회유해 공사를 가로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저가 과당경쟁으로 개미 투자자들도 상당한 피해"

출혈 경쟁의 대가는 가혹했다. 저가로 수주한 건설사들이 줄줄이 대규모 손실을 낸 것이다. 일례로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물산 건설 부문은 작년 3분기에만 각각 1조5127억원, 2960억원 적자를 냈다. 대부분 해외 공사에서 입은 손실이다. GS건설은 2013년에만 9000억원대 해외 손실을 털어내야 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일반 투자자 피해도 상당했다는 사실이다. 건설사들이 기습적으로 손실을 털어내면서 해당 기업 주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부동산학)는 "건설사들의 해외 공사 손실은 개미 투자자들이 파악하기 어려워 눈 뜨고 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건설사들이 저가 수주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CEO(최고경영자)와 담당 임원들이 "내 임기 중에 무조건 수주 실적을 끌어올리면 된다"는 식으로 '묻지 마 영업'에 나서기 때문이다. 과거 사우디나 쿠웨이트처럼 공사가 많은 국가에 한국 건설사들이 일시에 경쟁적으로 몰려드는 것도 원인이다.

◇"컨소시엄 구성해 出血 피해 막아야"

한국 건설사들이 저가 수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만큼, 이란 건설 시장에서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해 업계 차원에서 자율적 사전 조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경단련(經團連)이나 일본해외건설협회(OCAJI)가 해외 공사에 대해 과거 수주 실적과 공사 적합성 등을 고려해 사실상 순번을 정해 입찰하는 방식을 우리도 고려할 만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 시장이 협소한 우리 건설사들이 해외 경쟁에서 사전 조율을 꺼린다는 점이다.

김종현 해외건설협회 상무는 "우리나라에선 정책 금융기관인 수출입은행이나 무역보험공사가 이란 발주 공사의 자금 조달을 지원한다"며 "정부가 정책 금융기관을 통해 우리 건설사들의 출혈 경쟁을 사전 조율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우리 건설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으로 공사를 따는 것도 한 방안이다. 손태홍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건설사들도 시공 능력이나 금융 조달 능력에 따라 공동으로 수주하는 전략을 펼치면 과당 경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