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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할미넴'

바람아님 2016. 4. 6. 09:55
중앙일보 2016.04.05. 00:34

금요일 밤, 아무 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 할머니와 힙합가수가 떼로 등장하는 기묘한 장면과 마주쳤다. 이름하여 ‘힙합의 민족’(JTBC). 나이 여든의 배우 김영옥을 비롯해 평균 나이 65세 할머니들의 힙합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란다. 아무리 힙합이 대세라지만 허세와 디스(상대를 말로 깎아내리는 것)·욕설 탓에 40대인 나도 때론 거부감이 드는데 이걸 할머니들한테 시킨다고?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채널을 고정했다. 힙합의 ‘힙’자도 모르면서 젊은애들 가르치려 드는 막무가내 할매들 상대하느라 땀 좀 빼는 힙합가수들, 이런 걸로 좀 웃겨 보려는 얄팍한 예능이려니 했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
안혜리 뉴디지털실장

그런데 웬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할머니와 힙합가수 둘 다 진지했다. 어느 누구도 예능이라는 방패막 뒤에 숨어 “(어린) 니들이 인생을 알아?”라고 꼰대질하거나 “(늙은) 니들이 힙합을 알아?”라고 디스하지 않았다. 또 적당히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열심히 도전하고 그런 모습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시했다. 과정뿐 아니라 결과도 훌륭했다. 민망한 헛웃음을 기대했다가 기분 좋은 일격을 당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방송이 끝난 후 악플 일색이던 포털과 SNS에 “할미넴(‘할머니’와 미국의 유명 힙합가수 ‘에미넴’을 결합한 말), 멋있다”거나 “저렇게 늙고 싶다”는 반응이 이어진 걸 보면 나처럼 느낀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도전뿐 아니라 같이 출연한 힙합가수에게도 냉소적이었던 젊은 힙합 팬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나이를 벼슬처럼 앞세우는 대신 나이와 무관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또 나이가 아닌 실력으로 상대를 인정하고 배우려는 할머니들의 열린 자세였을 것이다. 힙합 특유의 스웨그(자아도취)는 유지하면서도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는 힙합가수 역시 한몫했을 테고.


그러고 보니 지난해 개봉해 "세대 간 화합 영화”라는 평을 받은 ‘인턴’도 그랬다. 간부로 퇴직하고 인턴으로 새 인생을 출발한 늙은 인턴 벤이 나이를 앞세우지 않고 경륜으로 젊은 CEO 줄스와 호흡을 맞추는 걸 보면서 많은 젊은이가 “저런 어른을 갖고 싶다”고 소망했다. 그땐 다들 영화 속 얘기일 뿐이라고 했지만, 할미넴의 도전을 보니 우리에게도 이런 어른이 없으리란 법이 없겠다.


할머니가 랩을 하는 이 말도 안 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세대 갈등의 해법을 어렴풋이나마 봤다. 힙합과 할머니. 대척점에 선 이 조합이 이토록 훌륭한 조화를 이뤄낸다면 다른 분야에서도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안혜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