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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부희령] 병원 복도에서

바람아님 2016. 5. 12. 23:53
국민일보 2016.05.12. 19:42

벽에는 르누아르의 ‘뱃놀이의 점심 식사’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의 한 부분만 확대한 것이다. 한 소녀가 강아지를 안고 입이라도 맞출 듯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옆모습. 그림에서 시선을 돌려 병원 복도를 둘러본다. 저쪽 끝,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 사이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림 밑에 적혀 있던 설명을 떠올린다. 인상파 화가들은 날고기의 붉은색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를 언뜻 본 것 같다. 날고기라니. 도대체 내가 무엇을 읽은 것일까.

진료실 앞 접수대로 다가가 아버지 이름을 대고 아래층에서 검사를 받고 올라왔다고 말한다. 간호사는 나에게 환자의 생년월일을 묻는다. 나는 잠시 당황한다. 아버지가 언제 태어났더라. 어느 새 곁에 다가온 아버지가 간호사에게 자신의 생년월일을 일러준다.


아버지는 식민지의 신민으로 태어났고, 십대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를 잃은 직후 해방을 맞이했으며, 학도병으로 끌려나가 6·25를 겪었다. 휴전선이 생긴 뒤에는 고향을 잃었다. 스무 해를 채 살기도 전에 그런 일들을 어찌 한꺼번에 겪었을까. 물론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드물지 않은 사연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말이 없었고, 표정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직접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적이 없고, 나 또한 아버지에게 내 생각이나 감정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지금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여전히 할 말이 없다.


진료실에서 만난 의사는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다.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지 설명을 듣고 다시 복도로 나온다. 르누아르의 소녀 앞을 지나면서, 나는 재빨리 설명을 훑어보며 날고기라는 단어를 찾는다. 인상파 화가들은 검은색을 쓰지 않았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오래전 부모도 고향도 잃은 아버지가 나를 지나쳐 걸어간다. 이따금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왜 손을 뻗어 늙은 나의 아버지를 붙잡지 못하는지, 부질없이 묻는다.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