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5.22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위인이나 영웅의 실상은 흔히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십상이다. 때로는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 때문에 유명 인사의 삶의 일면만 크게 부각되고 다른 부분은 은폐되기도 한다. 헬렌 켈러(1880~1968)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시각과 청각을 잃고 암흑과 침묵의 세계에 갇혀버렸으나 앤 설리번 선생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다소 놀라운 일일지 모르겠으나, 실상 그녀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로서 매사추세츠주 사회당원이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소련을 찬양하고, 책상 위에는 붉은 기를 걸어둘 정도였다. 그녀의 생애를 다룬 책과 영화들은 대개 이런 점들을 무시하고 단지 교육과 사회봉사에 헌신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그릴 뿐이다.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에 기울게 된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구를 통해 맹인이 전 인구에 골고루 분포된 것이 아니라 하층계급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안전사고를 더 많이 당하는 데다가 적절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맹인이 되는 비율이 훨씬 높았으며, 또 많은 빈민 여성들이 매춘으로 내몰려서 매독에 걸려 시력을 잃기도 했다. 계급제도는 시각 장애 비율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인간의 삶에 결정적이라는 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사회주의자가 되자 그녀에 대한 세간의 평판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지금껏 그녀의 용기와 지성을 예찬했던 신문들은 이제 그녀가 불구자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야비하게 공격했다. 장애 때문에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식의 비판이 이어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훌륭한 위인으로부터 분노의 대상으로 변했다.
소련에 대한 그녀의 찬사 같은 것은 현재 입장에서 보면 유치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마음속 깊이 깨친 바를 행동으로 옮긴 헬렌 켈러는 진실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역사상의 인물들에 대해 편향된 시각에서 우상화하거나 악마화할 것이 아니라 삶의 본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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