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1.04.19 우정아 KAIST 교수·서양미술사)
하얀 킬트를 입은 고대 이집트 서기(書記)가 책상다리를 하고 무릎 위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반쯤 펼쳐 둔 채 꼿꼿하게 앉아 있다. 그의 오른손은 글씨를 쓰고 있는
것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엔 펜이 쥐여 있었을 것이다.
석회석 위에 채색한 이 좌상<사진>은 손마디와 손톱, 살짝 늘어진 뱃살과 튀어나온
광대뼈까지 묘사해 수천 년 전에 살았던 한 남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좌상의 모델과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추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모델이 왕족 신분이거나 높은 귀족 계층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서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읽고 쓸 줄 아는 것은 신성한 능력이었고, 신이나 다름없던 파라오의 명을 받아 적고, 후대를 위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고귀한 직분이었다. 왕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혔던 이 서기는 사후 세계에서도 그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영원히 글을 쓸 것이다.
이 상의 높이는 53.7㎝,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그러나 어둑한 미술관 전시실에서
밝은 조명을 받으며 앉아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면, 마치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을 마주
대한 것 같은 전율이 느껴진다. 흰 마그네슘 원석에 수정을 박아 넣은 눈동자가 그야말로 종이를 뚫을 듯 강렬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 좌상을 수호신으로 삼아도 좋겠다. 간혹 글 쓰는
일이 게을러질 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려는 의지로 강렬하게 깨어 있는 서기의 눈빛을 떠올려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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