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2.06.24 손철주 미술평론가)
각이 바르게 선 동파관(冠)이 제법 높다. 동정 없는 곧은 깃에 소매 둥근 도포는 품이 낙낙하다. 배꼽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아 소맷부리에 꽃무늬 같은 마디가 생겼다. 가슴에 두른 새까만 끈목은 납작하다. 돗자리를 밟은 버선발이 희디흰데, 버선코에서 살짝 들린 선이 맵시 난다. 보다시피 전신입상(全身立像)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서 있는 인물은 드문 편이다. 이 사내, 어엿한 자태에 서린 기운이 녹록지 않다. 요즘 스타를 찍은 화보보다 존재감이 훨씬 강하다.
주인공은 서직수(徐直修·1735~?)라는 문인이다. 사료를 뒤져봐도 그의 행장(行狀)이 잘 안 나온다. '진사에 급제한 뒤 관직에 오르지 않고 평생 서화(書畵)를 즐겼다'는 기록이 고작이다. 놀라운 건 초상을 만든 화가들이다. 이명기가 얼굴을, 김홍도가 의관을 그렸다. 두 사람은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릴 때나 합작했던 궁중화원이다. 공경대부(公卿大夫)도 아닌 한낱 산림(山林)에 불과한 인물을 일류 화원들이 정성 들여 그린 이유는 미스터리다. 서직수는 그림에 소감을 남겼다. 그게 생뚱맞게도 불만에 찬 소리다. '유명 화가지만 한 조각 내 마음은 그리지 못했다.'
그 마음이 무엇이라서 이토록 평가가 인색할까. 서직수의 고백이 이어진다. '명산을 다니고 잡된 글을 쓰며 낭비했으나 스스로 속되지 않음을 귀하게 여겼다.' 초상에서 웬만큼 보인다. 숱이 적은 눈썹은 멧부리처럼 솟았고, 치켜뜬 눈초리에 광채가 번뜩이고, 도드라진 입술이 무겁게 닫혀 있다. 모가 날지언정 속기(俗氣)는 없어 '오골(傲骨·남에게 굽히지 않는 기질)'이란 표현이 딱 어울린다. 굽실거리지 않는 기질이 저 꼿꼿한 입신(立身)에 깃들었다.
그의 품평은 화가의 명성에 주눅 들지 않았지만 화가의 붓질은 이름값을 한다. 하긴 유명과 무명이 무슨 상관이랴. 초상은 남아야 할 이름을 기린다.
'서직수 초상' - 이명기·김홍도 합작,
비단에 채색, 148.8×72.4㎝, 1796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참고 이미지-얼굴부분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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