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아트칼럼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16]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바람아님 2013. 7. 21. 09:10

(출처-조선일보  2011.06.14  우정아 KAIST 교수·서양미술사)



온화한 파스텔톤의 벽과 피아노, 아이들이 둘러앉은 식탁. 화목한 분위기가 흐르는 평범한 가정의 거실에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순간 냉랭한 정적이 흐른다. 추레한 외투를 걸치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어색하게 집으로 들어서는 이는 바로 이 집의 가장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다. 그는 정치범으로 투옥되었다가 오랜 형기를 마치고 지금 막 집으로 돌아왔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1844~ 1930)은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사진〉를 통해 혁명의 시대에 개인들이 겪어야 했던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혁명가였던 그림 속의 아버지는 사회 개혁을 향한 원대한 포부와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던 의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남겨진 채 고난을 떠안았던 가족들에게 그는 단지 무책임한 가장일 뿐이었다. 힘겹게 되찾은 평온 속에서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감격의 드라마는 없었다. 어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고, 오래전에 아버지 얼굴을 잊은 아이들은 오히려 겁에 질린 표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아버지들 역시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그림 속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들은 세파에 시달리느라 정작 가족에겐 무심했고, 남은 가족들은 각자 알아서 그의 빈자리를 메워버렸다. 요즘 아이들에겐 퇴근 후 무뚝뚝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가 불편한 존재란다. 지금 '혁명'이 필요한 곳은 바깥이 아니라 집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