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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마구잡이 독서를 위한 변론

바람아님 2016. 9. 17. 10:04

(중앙일보 2016.07.26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기사 이미지아이들 여름방학이다. 
요즘은 다들 방학의 방(放) 자가 ‘놓을 방’ 자라는 것을 잊고 있는지 입시 대비 집중 공부 기간으로 
여기는 것 같다. 독서도 그렇다. 
‘인문학 고전을 읽어야 성공한다’ ‘수시 대비를 위해 서울대 추천 인문 고전 50선을 꼭 읽어야 한다’는
등의 조언 또는 겁주기가 난무한다. 리스트를 봤다.

키케로의 의무론,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아함경, 우파니샤드, 율곡문선 … . 
잠시 서울대 교수님들 중 이 50선을 모두 읽은 분이 몇 분이나 될지 불경스러운 의문을 가져보았다. 
나는 달랑 세 권 읽었더라. 부끄러운 마음으로 대신 뭘 읽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다.

사춘기 초반의 책 선정 기준은 명쾌했다. 야한 장면 유무다. 집에 있는 어른들 책을 샅샅이 뒤졌다. 
가구로 비치돼 있던 한국문학전집에 의외로 ‘왕거니’가 많더라. 
이효석의 ‘화분’, 송병수의 ‘쇼리 킴’, 조해일의 ‘아메리카’. ‘춘향전’과 ‘아라비안 나이트’는 원본으로 봐야 보물임도 곧 
발견했다. 아마 요즘 소년들은 엄마가 남들 따라 충동구매한 한강의 ‘채식주의자’ 2부에서 보물을 발견할 거다. 
난 이런 보물찾기 과정을 통해 문학이라는 것이 의외로 재밌다는 것도 부수적으로 발견했다.

 기사 이미지고등학생 시절엔 뜬금없이 순정만화에 빠졌다. 
스포츠 아니면 무협 일색인 소년 만화보다 소재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꽃미남 귀족에 대한 소녀들의 선호 때문인지 유럽 배경이 많았다. 
‘베르사유의 장미’과 ‘테르미도르’를 보고 나니 프랑스 혁명사에 익숙해졌고, 
‘불새의 늪’을 본 후 교과서에서 위그노 전쟁을 만나니 반갑더라. 
‘유리가면’으로 연극이라는 장르에 흥미를 갖게 됐고, 
‘스완’으로 평생 발레에 관해 아는 척하고 있다. 
허영만의 만화로 랭보와 로트레아몽의 시를 접하고, 클래식 기타곡인 알베니스의 ‘전설’을 좋아하게 되었다. 
허 화백 덕은 판사가 된 후에도 보았다. 
‘타짜’ 덕분에 발뺌하는 사기도박 사건 피고인 앞에서 ‘병목’ ‘환목’ ‘깜깜이 바둑이’ 등의 전문용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대학 때 김용의 무협소설 전작을 탐독했더니 사시 1차 공부할 때 중국사와 다 연결되더라. 
‘녹정기’의 위소보는 강희제의 명으로 소피아 공주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다.

결국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고 세상 모든 것에는 배울 점이 있다. 
자녀에게 입시를 위한 거룩한 고전 읽기를 강요하는 건 ‘읽기’ 자체에 정나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양한 책이 집에 굴러다니게 하는 것, 
그리고 부모가 먼저 뭐라도 읽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