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신수진의 사진 읽기] [6] 또 다른 도전을 자극하는 '실험 정신'의 美德

바람아님 2013. 7. 30. 15:32

(출처-조선일보 2013.07.30 신수진 사진심리학자)


맨 레이(Man Ray·1890~1976)는 이미 20세기 초에 여러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였다. 조각, 사진, 회화, 동영상 등이 그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뒤섞여 자유로운 표현의 도구로 활용되었고, 이러한 방법은 그에게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힘을 지닐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과거로부터 영감을 받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시도함으로써 훗날 누구나 따라 하고 싶은 표현 양식을 지닌 작품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누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완벽한 형태미를 보여주는 여인의 뒷모습은 매끈하고 결점 없는 뽀얀 피부와 풍만한 여성미를 아름답게 표현했던 신고전주의 회화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의 모델이 된 여인은 당시 파리 사교계의 여왕이라 칭송받았던 '몽파르나스의 키키'이다. 터번을 쓰고 단순한 배경 앞에 반듯하게 앉아서 살짝 고개를 돌린 얼굴에서 나른한 매력이 흐른다. 하지만 앵그르와 키키만으로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여인의 뒷모습 사진 위에 현악기 전면에 있는 에프(f) 모양의 그림을 그려 넣은 후 다시

 맨 레이, 앵그르의 바이올린, 1924.      사진을 찍음으로써 전통적인 누드와는 거리가 먼 혁신적인 변형을 만들어냈다. 단순한 붓질을                                                  더했을 뿐인데 키키의 몸은 악기를 연상시키게 되었고 카메라 앞에 놓여 있던 현실은 상상의 세계로 던져졌다. 덕분에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을 수도 있고 오묘한 울림이 있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다.


예술가들의 실험적 도전이 지니는 가장 큰 미덕은 그가 남긴 작품이 후세 수많은 사람의 또 다른 도전을 자극하는 것이다. 맨 레이의 이 작품은 지금도 수많은 모작과 차용이 이루어지고 있을 만큼 인류 역사에 각인된 작품이 되었다. 평생을 실험 정신으로 무장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겠지만, 영감을 주고받는 일이야말로 진정 예술적인 것이다.


(참고-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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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출생1780년 8월 24일
프랑스 타른에가론
사망1867년 1월 14일
프랑스 파리
직업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년 8월 29일 - 1867년 1월 14일 )는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앵그르는 역사화에서 니콜라 푸생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전통을 따랐으나, 말년의 초상화는 위대한 유산으로 인정 받고 있다.

18년간 로마에서 옛 그림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라파엘로에 심취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고전파의 대가로서 환영을 받았으며 르누아르·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1]

과거를 깊이 중시했던 앵그르는, 한창 떠오르던 외젠 들라크루아의 양식을 대표하는 낭만주의에 맞서 아카데미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옹호했다. 그가 언급했던, 그의 모범상은 라파엘로가 영속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예술의 장엄한 영역을 정립한 때인 영광스러운 기억의 세기의 꽃을 피운 위대한 거장들이었다. 그는 '혁신가'가 아닌 좋은 예술체계의 '보존자'가 되려고 했다.[2] 하지만, 현대에는 앵그르와 당시의 다른 고전주의자들이 당대의 낭만적 정신을 구체화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3] 앵그르는 인상적인 공간과 형태의 왜곡으로 현대 예술의 주요한 선구자가 되었다.

대표작으로 <리뷔에르 부인의 초상> <목욕하는 여자> <터키 목욕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