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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자본주의 문화 속 성숙하게 '늙어가기'

바람아님 2016. 10. 23. 09:52

(조선일보 2016.10.22 백영옥·소설가)


[그 작품 그 도시] '나이 듦 수업' ― 대도시


대도시의 횡단보도를 바삐 건너는 시민들. ‘나이 듦 수업’은 노년과 죽음에 관해 여섯 명이 강의한 내용을 모았다. 

이전 세대와 전혀 다른 생애 주기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잘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픽사베이


'나이 듦 수업'을 읽었다. 고전학자, 여성학자, 심리학자, 노인 복지 전문가, 물리학 교수 등 

여섯 강연자의 강연 내용을 모은 책이다. 살아보지 못한 삶을 예상한다는 게 부질없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노년과 죽음에 자꾸 마음이 간다. 

몇 달째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는 아흔일곱 살 외할머니 때문이다.


2009년 유엔은 '호모 헌드레드' 시대를 선포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70세를 기대 수명으로 정했던 이전 세대와 전혀 다른 생애 주기를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 나이에 0.7을 곱한 것이 실제 나이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100세 시대를 기준으로 내 나이는 몇일까. 아직 30대가 되지 않았으니 기뻐해야 할까. 

그런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면 한쪽 면밖에 보지 못한다. 

65세를 은퇴 시점으로 계산하면 실제 나이가 45.4세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바꿔 얘기하면 20년 이상 더 일해야 할 시점에 우리는 덜컥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시간이 바꾸지 않는 건 없다는 것이다. 몸이 변하면 마음 역시 변해야 자연스럽다. 

그래서 '마음만은 청춘'이란 말이 내겐 꽤 버겁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이 마음과 몸의 시차는 어떻게 균형을 맞춰야 할까. 

'나이 듦' 수업은 젊음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소외받지 않고 성숙한 어른으로 늙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책이다.


"내가 50대인데 얼굴은 30대로 보인다. 그러면 지금 내 욕망은 뭐예요? 30대의 욕망을 갖고 있는 거죠. 

저는 앞으로 할머니와 손녀가 한 남자를 좋아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미친듯이 싸우는 내용의 드라마가 나올 것 같아요. 폐경은 축복인 거예요. 

이제 더 이상 출산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고 인생의 한 마디가 지나간 거예요. 

더 이상 여성으로서 남성의 짝짓기 대상이 아니어도 되는 거예요. 

남성의 눈에 들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는 시기라는 거죠. 이게 바로 노년이 외모와 성적 욕구로부터 얻는 자유예요. 

이 기막힌 시간을 왜 우울하게 여겨서 성호르몬 주사를 맞습니까. 

현대 의학은 그런 점에서 참 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을 계속 성적 주체로 호명하는 거예요."


고전학자 고미숙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모든 시간을 노동하지 않으면 성욕에 쓰라고 요구하는 게 불편하다고 잘라 말한다. 

그런 연유로 점점 커지는 실버 시장 이면에는 나이 듦을 쉽게 마주하지 못하는 노년의 불안과 공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병을 앓고 있는 게 좋아요. 그래야 몸을 조절합니다. 

쓸데없는 욕심을 안 부리고요. 그래서 늙고 병드는 게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달라이 라마나 교황을 보세요. 

우리 시대에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잖아요. 노인이라 안 아픈 데가 없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과 다 소통됩니다. 그것이 지혜예요. 지혜는 뭘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에서 나는 '생애 주기'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배웠다. 

생애 주기는 인간의 수명 70세를 기준으로 한 서구 제국 시대 심리학에서 나온 것으로 20~30대 젊은 남성들을 

최고의 생산 노동자로 동원하기 위한 장치인데, 생애 주기에 맞는 인생을 살아야 정상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의식적, 

무의식적, 제도적으로 엄청나게 압박한다는 것이 그녀 생각이다. 정희진은 노화는 감정의 하나라고 말한다. 

생물학적 나이에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개인만이 인지하는 지표들을 망라한 자기 개념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글에선 분노하고 좌절하는 한국 노인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단초를 얻었다.


"우리 노인 세대는 지배 집단에 대체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 세대가 인간성이 나쁘다거나 비겁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만큼 당시 폭압이 심했어요. 

저항하기보다는 순종하는 쪽이었습니다. 한국 노인 세대는 개인주의적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정부와 사회로부터 개인주의적 삶을 권장받지 않았습니까? 

정부에서 다 같이 좋은 사회, 복지 사회로 가자는 얘기 안 했잖아요. 

내 새끼만 잘되면 돼, 나만 잘살면 돼. 인생의 목표가 내 집 마련이나 자식의 출세로 좁혀진 거죠. 

노인 세대가 꿈꿔왔던 개인주의적 삶은 결국 실패로 끝난 겁니다. 

독재 정권에 저항하지 않고 불의를 봐도 웬만하면 참으면서 자식 잘 키우고 내 집 마련하고 싶었는데 안 되었어요. 

여기서 오는 허무감이나 무가치감이 상당히 큽니다." 

이 글을 읽으며 불운한 시절을 통과해낸 사람들의 내상에 대해 우리 세대가 너무 무지한 건 아니었냐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은 자기 삶이 가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결국 삶을 회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노년기의 중요한 심리적 특징이에요.

심리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해서 밝혀낸 바에 의하면 사람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해요. 

진짜로 무서워하는 건 뭘까? 이별이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 무서운 거죠. 

인생을 잘 살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무서워해요. 잘 산 사람은 오히려 이별할 힘이 있어요. 

심리학에서는 엄마가 아이를 잘 키웠느냐 못 키웠느냐를 판가름하는 척도로 '이별할 수 있는 힘'에 대해 얘기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건강하게 사랑했다면 아이가 떠나간 것을 이겨낼 수 있어요."


초고령화 시대에 들어가면 우리는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길에서 점점 더 많은 노인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잘 늙어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이전과 맞지 않는 생애 주기 때문에 생기는 세대 간 갈등이나 열패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노인이 되면 한 직업에 매달리지 말고, 다양한 일거리와 일감을 찾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노인 전문가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퇴직을 당하지 않고 준비한 사람들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울 송파구 저소득층을 위해 집수리를 전문으로 해주는

'달팽이 건설'과, 지방대 학생들의 경쟁력과 자존감을 높이는 교육을 돕는 시니어 봉사자들이 만든 '아름다운 서당'이었다. 

2016년 5월, 칠순을 맞이한 아빠는 자신의 40년 직종에서 은퇴했다. 

절차처럼 찾아온 상실과 우울감을 그는 서예와 산책으로 이겨내고 있다. 

'은퇴 후 가장 나빠지는 관계는? 자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시처럼 박힌 제목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한 아빠에게 꼼꼼히 밑줄을 그은 이 책을 선물할 생각이다.


●나이 듦 수업―고미숙, 정희진, 장회익, 김태형, 유경, 남경아 지음



나이듦 수업 : 중년 이후, 존엄한 인생 2막을 위하여 

지은이: 고미숙,정희진,김태형,장회익,남경아,유경 

서해문집/ 2016/ 240 p

199.7-ㄴ32ㅅ/ [정독]인사자실(2동2층)/[강서]2층종합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