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2016.10.22 07:34
아는 분 딸이 서울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손 꼽히는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변호사가 아닌 일반 사무직이다. 이 딸은 사춘기가 있었나 할 정도로 부모 속 썩이는 일 없이 착하게 자랐다. 아는 분은 이 취업난에 졸업하자마자 직장에 들어간 딸이 너무 기특했다. 그래서 “1년간은 저축도 하지 말고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입고 싶은 것 사 입고 좋은 곳으로 여행도 다니면서 버는 돈을 쓰라”고 했다. 대학 들어가려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 땐 취업을 위해 애쓴 딸이기에 1년간은 마음껏 돈을 쓰며 인생을 즐기기를 바랬다.
하지만 딸은 행복하지 않았다. 법률사무소에 들어가니 자신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대우도 더 잘 받는 변호사들이 눈에 보였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할 만큼 고된 업무에 시달리는 변호사지만 딸에겐 사회적 계층구조 속에서 더 올라가야 할 곳으로 보였다. 딸은 마음 편히 지내라는 엄마의 권유를 마다하고 통번역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며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마 법률 공부는 체질에 맞지 않았는지 로스쿨 가겠다는 말은 않는다고 한다.
아는 분이 딸에게 말했다. “너 지금 다니는 직장도 엄청 좋은 곳이야. 월급도 변호사보다야 적지만 웬만한 대기업 직원 못지 않고. 그런데 통번역대학원에 뭐하러 가려는 거야?” “일이 재미가 없어. 행복하지가 않아.” “통번역대학원 나와서 통역하고 번역하면 행복해?” “몰라. 일단 해보는 거야.” “그게 뭐야? 일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엄만 왜 내 꿈을 꺾으려 그래?” “꿈이 뭔대?” “뭔지 모르지만 뭔가 재미있고 행복한 일을 찾아야지.”
아는 분은 내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가 공부만 하다 보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제대로 생각이나 해봤겠어요?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만 했지. 직장에 들어가 보니 힘들었겠죠. 출근해서 윗사람 지시 받으며 일해야 하고 막내니까 눈치 봐야 하고. 그런데 무슨 일을 하든 별다를 게 없는데.”
10대 땐 공부 잘해 좋은 대학 가는게 자랑이고 20대 땐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 30대 땐 좋은 배우자와 결혼해 좋은 곳에 집 사는 것, 40대 땐 승진해서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것, 50대 땐 재산이 많은 것, 60대 땐 자식이 성공하는 것이 자랑이다. 70대가 넘어서면 그저 자기 몸 하나 건사하며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자랑이다. 50대들이 모이는 동창회에서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다고 자랑하거나 20대 때 취업 잘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다.
지나고 보면 10대 때 공부를 못해 별 볼일 없는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20대 때 취업이 좀 늦었다고 해서 큰 일 날 일은 아니었다. 그 순간에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암담해 보이지만 지나고 보면 그저 한 세월을 지낸 것뿐이다. 70대가 되면 자기 건강한 것만 자랑이 되듯 젊은 시절에 얼마나 공부를 잘했든,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든,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든 별 인생이 없다.
아는 분이 말했다. “나도 대학원도 나오고 했지만 지금 60 가까이 되고 보니 자식들 잘 커 주고 우리 부부 건강한 게 남는 거지 다 소용 없더라고요.” 물론 젊은 시절 더 높이 날아오르고자 하는 꿈과 수많은 시도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꿈을 갖고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유효하다. 문제는 행복을 언제나 미래에서 찾으려는 생각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 안에 있는데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현재의 순간을 희생해선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친구들과 밤 늦게까지 어울리며 PC방 가서 게임하고 밥 사 먹고 거리를 쏘다니며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불과 5개월만 지나면 고등학생인데 분초를 아껴 공부할 시간에 왜 저러고 있나 싶다. 이런 생각으로 아들만 보면 잔소리를 쏟아내며 들들 볶다가 마음을 내려 놓았다. 아들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16살 때 친구들과 어울리며 행복해하며 추억을 쌓는 것이 수학 공식 하나 더 익히고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현재의 욕망을 희생하며 애쓰는 삶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애씀 속에서 보람을 찾아 현재를 살아내지 못한다면 행복은 언제나 미래로 유보될 뿐이다. 어려운 현실 속에 애쓰는 모든 젊은이들이 현재 속에서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길 희망한다.
머니투데이 권성희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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