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덕 학예사 무덤 부장품 통계분석해 ‘귀족 남자’ 주장
굵은귀고리, 주검 칼 안차 ‘왕비 혹은 왕족 여성’ 반론 만만찮아
95년 전 사상 처음 신라금관이 나왔던 경주 고분의 주인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왕인가, 귀족인가?
경주 노동동에 있는 금관총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를 둘러싼 오랜 논란이 최근 더욱 뜨거워졌다. 이런 흐름은 예상밖이다.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이 1921년 일본 학자들의 첫 발굴 당시 나온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을 재조사하다 몸체에서 ‘이사지왕’(?斯智王)이라는 이름을 확인했고, 지난해 재발굴에서도 같은 이름이 새겨진 칼끝 장식을 발굴해 무덤 주인이 이사지왕이란 설이 굳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 뒤 이런 설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귀고리 등의 부장품 양상으로 볼 때 여성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적지 않고, 최근 남성이나 이사지왕으로 본다 해도 귀족일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21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학술 심포지엄 ‘마립간의 기념물 적석목곽분’은 금관총 주인공의 성별을 둘러싼 고고학자들의 난상토론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쟁점은 윤상덕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사가 발표한 ‘금관총 피장자의 성격 재고’라는 발표 내용이었다. 그는 신라 전기 주요 고분 71기에서 나온 부장품 출토 데이터를 최신 통계 프로그램에 넣어 비율표로 분석한 결과 금관총은 최고위급 남성 귀족이 묻힌 무덤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는 학계의 통설과는 크게 달라 격론을 일으켰다. 상당수 연구자들은 금관총에서 여성이 단 것으로 추정되는 굵은고리 귀고리가 나왔고 큰 칼을 찬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을 근거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해왔고, 이사지왕도 ‘마립간’이란 이름으로 왕을 호칭했던 5세기 내물~지증왕 시기 왕 중 하나로 해석해왔기 때문이다.
윤 연구사가 제기한 근거는 두가지다. 첫째, 경주의 전형적 고분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들을 크기에 따라 6개 군으로 나눌 경우 금관총은 황남대총, 봉황대처럼 지름 60m를 넘는 대형 왕릉급(1군)보다 훨씬 작은 지름 45m 정도로 추정되는 3군에 들어가 왕릉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라 고분의 주인을 여성으로 판별하는 근거가 됐던 굵은고리 귀고리(태환이식)가 금관총에서도 나왔지만, 여성이란 증거로 활용할 수 없다는 논지다. 일제강점기 발굴 보고서를 보면 이 귀고리가 주검 자리의 귀 부분 아닌 금관 위쪽에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고서 자체도 부실하게 만들어져 정확한 출토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고리로 성별을 가늠할 수 없다고 보고 금관장식, 모관(고깔모자), 갑주, 큰 칼 등의 다른 부장품을 중심으로 다른 70개 고분의 부장품과 통계치로 비교 분석해 보니 남성이란 결과가 나왔다는 설명이다. 무덤 주인이 남성이라면 출토 칼에 새겨진 이사지왕이 되며, 무덤 크기로 미뤄 그는 마립간이 아니라 당시 국정을 왕과 논의하던 경주의 여섯 지역 세력, 곧 육부의 최고위급 귀족이라는 결론이었다.
이에 대해 적석목곽분 권위자인 이희준 경북대 교수는 “과학적 통계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여성으로 판별할 수 있는 태환이식 같은 부장품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사지왕이 소지왕이나 자비왕일 것이란 설을 제기해온 김재홍 국민대 교수도 “남성이면 곧 이사지왕이란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왕비, 측근 등의 무덤 제례 때 이사지왕이 자기 칼을 넣어줬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제례 무당 성격을 지닌 화랑도의 예를 들며 주인이 남성이더라도 실제로는 여성 구실을 한 인물일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결국 이날 심포지엄은 다양한 부장품 자료들을 널리 검토하며 논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선에서 갈무리됐다.
금관총 무덤 주인 논란은 칼 명문 발견 직후 이사지왕 설이 대두됐지만, 지금은 잠잠해졌다. 2014년 김재홍 교수가 명문 칼이 관 안에 있지 않고, 둘레에 호위하듯 놓인 부장품 성격이 강하다며 이사지왕은 아니라는 논고를 내놓은 이래로 이 주장이 통설로 수용되는 분위기다. 대신 남녀 성별과 명문의 이사지왕이 신라 군주인지, 6부의 수장급인지를 놓고 논란이 옮겨가고 있다. 금관총을 쌓은 5세기 마립간 통치 시기 신라의 정치사회상이 아직 안개에 싸여 있어 금관총의 실체는 계속 논란거리로 남을 공산이 커 보인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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