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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조선의 멸망과 간언(諫言)

바람아님 2016. 11. 7. 23:48

동아일보 2016-11-07 03:00:00


  ‘사람은 검소한 이와 함께하면 사치심이 없어지며, 공손한 사람과 더불어 지내면 오만한 마음이 없어지고, 어진 사람과 함께하면 사나운 생각이 없어지며, 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유약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고종 재위 16년, 사헌부의 종3품 관리가 국왕에게 국정 보고를 올리면서 ‘수신 제가 치국修身 齊家 治國)’의 방도를 전하는 대목이다. 정무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음을 임무로 하는 사헌부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의 민정비서관실과 공직기강비서관실에 정무비서관실을 합친 정도라 할 만하다. 종3품이면 지금의 3급쯤 된다.

 나라 살림이 말이 아닐 때였다. 재해와 흉년으로 민생은 해를 이어 도탄에 빠졌다. 연일 재정 긴축 명령이 하달되는 와중에 일각에서는 사치품 수입이 급증하는 1879년 초였다.

 왕은 모든 법 위에 군림하는 전제군주지만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3급 공직자가 최고 권력자에게 국정 업무는 물론 개인 신상의 세부 사항에까지 직언하는 제도적 장치가 가동되는 체제였다.

  ‘요즘의 나라 형편을 보면 곳간과 창고가 텅텅 비어 공무원과 군인 봉급을 제때 지급하기 어렵고 관청에 고용한 일꾼들 급료도 대지 못하여 더 버티기 힘든 모양입니다. 비록 대기근을 겪은 뒤라고는 하지만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고종실록 1879년 1월 24일)

 첫 통상조약 체결 후 일본인 출입이 늘어나고 북쪽에서는 러시아의 공략이 거세지고 있어 군대 정비가 당장 시급하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환란의 시기에 국왕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해 직언하는 3급 공직자의 1879년 경고는 다음 해부터 현실로 나타났다. 

 1880년 들어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파고 앞에서 ‘조선책략’으로 대변되는 다원화 외교 전략은 유림을 위시한 압도적 반대 여론 앞에 시도조차 무산되고, 2년 뒤 임오년의 군란으로 오랜 내란의 서막이 오른다.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군인들을 피해 지방으로 피신한 왕비가 무당과 조우해 필생의 연을 맺게 되는 해이기도 하다. 다시 2년 뒤 갑신년의 정변으로 국왕 부부가 총칼이 난무하는 궁궐 안팎을 떠돌고, 다시 10년 뒤 갑오년의 내란과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만신창이가 된 나라에서 다음 해 왕비가 시해되고 그 다음 해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병신년까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대환란의 시기가 펼쳐졌다.

 120년을 돌아 다시 병신년에 되돌아보는 그 옛날 국왕 주변 공직자의 국정 건의는 왕정과 공화정의 차이를 무색하게 하는 감마저 준다.

 조선이 큰 갈림길 앞에 선 그 시기에 국왕을 향한 3급 공직자의 진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라에 기강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혈맥이 있는 것과 같아서, 기강이 없는 나라는 위태롭습니다. 군주란 본보기와 같아서 본보기가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고, 군주란 근원과 같아서 근원이 맑으면 흐름도 맑아지는 법입니다.’

 그 고언에 국왕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현재의 폐단을 이처럼 절실하게 개진하니 참으로 가상하도다.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러고도 26년 후 나라는 패망의 을사년에 도달했다.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