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8년(1784) 창덕궁에서 정조가 처음 얻은 아들인 문효세자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보양관과 인사하는 상견례가 열렸다. 당시 상견례의 모습은 '문효세자보양청계병'(文孝世子輔養廳契屛)이라는 8폭 병풍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세자의 보양관 상견례는 병풍으로 제작할 만큼 대단한 행사가 아니었다. 이 계병(契屛, 나라의 큰 행사를 기념해 만든 병풍)을 제외하면 세자의 보양관 상견례를 묘사한 궁중행사도는 없다. 정조가 파격적으로 보양청계병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유재빈 서울대 강사는 지난달 29일 끝난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정조대 왕위 계승의 상징적 재현'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문효세자보양청계병'이 순조로운 왕위 계승을 바라는 정조의 마음과 공로를 선점하려는 대신들의 문제의식이 구현된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유 강사는 문효세자가 원자(임금의 맏아들)로 정호되고 세자로 책봉될 당시의 정치적 상황, 좌의정 이복원이 계병에 쓴 서문, 계병에 나타나는 도상과 특징 등을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1782년 태어났다. 당시 의빈은 후궁이 아닌 궁녀였기 때문에 정조는 문효세자를 원자로 정하기 주저했으나, 소론의 요구로 결국 생후 3개월 만에 원자로 삼았다. 이후 정조는 원자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정1품 정승을 보양관에 임명하고, 보양관 상견례에 대신을 참석시켰다.
이에 대해 유 강사는 "정승이 원자의 보양관이 된 사례는 문효세자가 유일하다"며 "정조는 보양청 관원과 내시만 참여하는 간소한 행사인 상견례를 '대례'(大禮)로 규정해 성대하게 치렀다"고 설명했다.
계병의 서문에도 이 행사의 중요성에 관한 의미 있는 대목이 있다. 이복원은 "화공을 불러 그 일을 그리게 하여 병풍 여덟 개를 만들어 일곱 사람(대신)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하나는 보양청에 둔다"고 적었다.
이전까지 계병은 행사 참여자들이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사적으로 만들었으나, '문효세자보양청계병'은 국가를 대표하는 신하인 대신들이 제작해 왕에게 보여준 공적인 그림이었다. 이 계병은 상견례 참석자의 기념물일 뿐 아니라 군신 간의 공조를 확인하는 징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 강사는 또 계병에서 지붕의 옆면인 붉은색 박공이 원자 위에 배치된 점으로 미뤄 상단을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설정했다는 점도 특이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통 왕세자는 스승을 뵐 때 동쪽에 앉아 서향했는데, 이 그림은 동쪽을 화면의 위쪽으로 상정함으로써 동서로 마주 본 의례를 상하 수직 구도로 바꾸어놓았다"며 "원자를 정점으로 한 삼각 구도와 인물에만 적용된 투시원근법으로 인해 원자와 대신들 사이에 위계적 질서가 부여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상견례가 벌어지는 궁궐 바깥의 석축이 높은 전각은 '왕실', 돌담과 시속 인물은 '백성'을 각각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유 강사는 "계병을 통해 문효세자의 보양청 상견례가 왕실과 조정, 민간에 영향을 미치는 경사임을 알리고자 했던 것 같다"며 "정조 대에 완성된 화성능행도를 보면 왕실 중심의 시각물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문효세자보양청계병에서 그 전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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