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6.11.15 길해연·배우 김도원 화백)
"아이고, 큰일 났어, 큰일." 따끈따끈한 두부가 든 비닐봉지를 내팽개치듯 던져 놓으며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소리를 지르셨다.
"요 앞에서 글쎄 어떤 학생이 나더러 담배를 좀 사 달라 그러는 거야."
그 학생, 겉옷 자락을 잡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담배 한 갑만 대신 사 주시면 돼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하며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를 내밀었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건장한 남학생 네다섯 명이 골목 어귀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더란다.
"요 앞 어디요? 우리마트야, 드림마트야?"
담배 셔틀을 당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진 나는 신발을 꿰차고 밖으로 나섰다.
"어딜 나서? 그놈들 인상도 험악하고 덩치는 얼마나 큰데…."
말리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뛰쳐나오긴 했는데 몇 걸음 걷지 않아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그 아이들을 찾아낸다 한들 뭘 할 수 있을까?
'너희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되돌아오는 건 코웃음이 뻔할 테고 '이 아이를 가만 좀 내버려 둬' 하며 괴롭힘을 당하는
남학생을 품에 안고 절규한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둘이 같이 어두운 골목으로 끌려 들어가 두들겨 맞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잘난 척한 내 덕분에 그 아이는 두고두고 더 큰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게 뻔할 것이다.
경찰에 신고를 해? '여기 담배 셔틀 당하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도와주세요….'
에이, 차라리 수퍼맨이 나타나길 바라는 게 낫지! 생각은 점점 빈궁해지고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해연아, 해연아…." 여든 다 된 노모의 목소리에 그제야 걸음이 멈추어졌다.
푸르뎅뎅하게 얼어붙은 발등이 근질거리더니 보지도 못한 그 남학생의 맨발이 내 발등 위로 겹쳐졌다.
수퍼맨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보호해 줄 수 있는.
그런데 너무 당연한 결론 앞에서 왜 그렇게 부끄럽고 미안한 건지.
어느 날 이 골목 어디에서 그 아이들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가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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