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그때그일그사람

[임진년 그 사람들]⑬이원익, '외국어'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전시 명재상

바람아님 2017. 1. 8. 23:40
아시아경제 2017.01.08 08:11
이원익 초상(사진=위키백과)


흔히 '오리대감'으로 알려진 이원익은 류성룡과 함께 전시 모범적인 재상의 표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이순신장군을 추천한 류성룡조차 이순신이 모함을 받았을 때 사형을 해야한다며 등을 돌렸지만 끝까지 목숨을 걸고 이 장군을 변호해 나라의 큰 위기를 막은 것으로 유명하다.

벼슬생활은 선조가 갓 왕에 즉위한 1569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근무하면서 시작됐다. 성품이 소박하고 조용해 사람 사귀기를 즐기지 않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훗날 명재상이 되는 류성룡만은 그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벼슬에 오른 후 중국어를 대단히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퇴근 후에는 집에 틀어박혀 얼굴을 볼수 없기에 주변에서 규방의 처자보다 얼굴보기 어렵다고 놀렸지만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훗날 명나라에 갔을 때 이 외국어 공부실력이 빛을 발했다. 명나라 예부상서를 만나 통역도 없이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며 일사천리로 일을 끝마치자 이원익을 무시하던 역관들과 동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감복했다고 한다.


이런 성실성이 인정받아 1576년에 율곡 이이의 천거로 사간원 정언(正言)이 됐고 2년 후엔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에 승지가 됐다. 업무능력이 탁월하고 매우 성실하다는 평을 받아 빠르게 승진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587년 임진왜란 직전에는 평안도 안주(安州)에 전염병과 기근이 닥쳐 민생문제를 해결할 전문가가 필요했는데 이원익의 실무 능력이 인정돼 정3품 안주목사에 기용됐다.


안주 목사를 맡을 당시 이원익은 우선 양곡 1만석을 동원해 구휼에 나섰으며 곡식 종자를 마련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누에치는 법을 가르치고 권장해 재활에 힘썼다. 또한 피폐해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지방군이 수도에 교대로 파견 나가서 근무하는 번상병제(番上兵制)의 교대기간을 3개월에서 2개월로 줄였는데 성과가 뛰어나서 후에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에 확대 적용됐다.

임진왜란 때는 정2품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직해 왕의 피난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또한 곽재우 등의 의병장과 교류해 이를 위무하고 또한 이순신이 고니시의 계략에 휘말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변호했다. 전후에는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해 주위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류성룡을 변호하다가 함께 사직했다. 이후 1600년 다시 소환돼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됐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면서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고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시행토록 하여 명성이 자자해졌다고 한다.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해 나갔으나 1615년 인목대비 폐모(廢母)론을 반대하다 홍천에 유배됐고 1619년에 풀려나왔다.

이 유배 당시에 70 가까운 나이에도 돗자리 짜는 것을 배워 소일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유배가 풀린 후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영의정이 되자 유배 당시에 그가 만든 돗자리는 영상대감이 만든 돗자리로 알려져 값이 엄청 올라 500냥에 팔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