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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일본 원정 실패 원인은 '가미카제(神風)' 가 아니었다"

바람아님 2017. 1. 9. 23:37
[중앙일보] 입력 2017.01.09 11:09
[사진 = 원나라 원정군의 군선을 공격하는 일본군을 그린 메이지시대 서양화가 야다 잇쇼(矢田一嘯)의 작품.]

[사진 = 원나라 원정군의 군선을 공격하는 일본군을 그린 메이지시대 서양화가 야다 잇쇼(矢田一嘯)의 작품.]


유라시아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원(元)은 13세기 두 차례나 바다를 건너 일본 원정에 나섰다. 일본에선 이를 도적에 빗대 ‘원구(元寇)’라 부른다. 그러나 1274년(1차 원정)과 1281년(2차 원정)의 원정은 모두 실패했다. 때마침 불어 닥친 태풍 때문이었다는 게 그간의 정설이다.

일본에선 이 태풍을 두고 나라를 구한 ‘신의 바람(神風·가미카제)’이라 추켜 세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부는 제로센 전투기로 미군 함대에 돌진한 자살 특공대에 같은 명칭을 부여했다.

이 같은 기존 학설을 뒤집는 새로운 연구 내용을 아사히신문이 8일 소개했다. 일본 중세사 연구자인 핫토리 히데오(服部英雄) 구마모토문학·역사관장은 몽골군 퇴각 원인이 태풍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태풍설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더 분명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특히 1차 원정 시기를 서력으로 역산해 보면 11월에 해당하는데, 태풍이 부는 계절이 아니다. 핫토리 관장은 “한랭전선이 통과하면서 폭풍이 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량의 군선에 피해를 줄 만한 바람도 아니거니와 기록도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퇴패 원인은 무엇일까? 핫토리 관장은 원정에 나선 몽골군 병력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갈 목적으로 원정군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서에는 군선 900척, 병력 4만명으로 기록돼 있지만, 그는 실제 규모를 112척, 1만2000명 수준으로 추산했다. 원정에 성공할 만큼 충분한 군사가 없었다는 해석이다.

핫토리 관장은 7년 뒤 이뤄진 2차 원정 역시 태풍 피해보다는 식량 등 군수물자 부족에 따른 실패로 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군의 반격이 예상보다 강했던 탓도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당시 ‘가미카제’를 승리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세력은 신사와 사찰이다. 무사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전적으로 자랑했다”고 부연했다.

3차 원정이 계획돼 있었지만 원 황제 쿠빌라이 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됐다는 기존 학설에 대해서도 이견이 나왔다. 1258년과 1285년, 원은 베트남 원정에도 두 차례 나섰는데, 모두 실패하면서 또 다른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했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실제와 달리 왜곡된 가미카제 신화가 만들어진 까닭은 서구 열강의 위협에 직면한 메이지(明治) 시대의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고 아사히는 평가했다. “신의 나라는 불멸하다”는 가치관을 일본 국민에게 심어 외세에 저항하고 국력을 키우는 데 이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