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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그 사람들]⑭심유경, 동아시아 3국을 속인 희대의 국제사기꾼

바람아님 2017. 1. 15. 23:21
아시아경제 2017.01.15 08:02
드라마 '징비록'에 나온 심유경 모습(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캡쳐)


역사 속에 여러 사기꾼들이 등장하지만 세 나라에 걸쳐 국제사기를 벌인 희대의 사기꾼은 심유경(沈惟敬)이 유일하다. 심유경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짜고 명과 조선, 일본 3국을 속여 거짓 평화협상을 이끌다가 정체가 탄로나 처형된 인물이다.


그정도 국제 사기를 벌일 정도면 아주 대단한 위치에 있었을 것 같지만 조선에 사신으로 오기 전에는 특별한 기록도 없다. 조선에 사신으로 오게 된 배경도 그가 정식으로 사신에 임명돼 온 것이 아니라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이 왜군의 동태를 정탐시키기 위해 파견한 것으로 원래는 절강성의 상인이었다.

그는 중국 남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곳은 당시 왜구 침략도 잦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대상 교역도 활발했다고 한다. 심유경도 그래서 일본어를 잘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국제 무역에도 많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승훈(祖承訓)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조승훈이 이끌고 온 선봉부대가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심유경은 시간을 끌기 위해 임시 화평을 꾀하라는 지시를 받고 일본과 협상에 나서게 된다.

신기삼영유격장군(神機三英遊擊將軍)이란 괴이한 명함을 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만난 심유경. 그러나 역시 타고난 상인출신인 고니시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수차 화평 협상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남해안 일대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의 대활약으로 일본군의 보급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 여기에 겨울이 닥치면서 심유경과 고니시는 어떻게든 협상을 이끌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내건 조건과 명나라 조정이 내건 조건을 충족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요토미는 조선 8도 중 남부 4도를 할양하라는 한반도 분할과 명나라 황녀를 후궁으로 보내줄 것을 주장했고 명나라는 일본 측의 무조건적 철수와 사죄를 요구했다. 조선 측은 애초 협상을 원치않고 끝장을 볼 기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심유경과 고니시는 국서를 위조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일단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에게 "도요토미는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된다면 신하로서 조공을 바치겠다"는 내용으로 일본 측 국서 내용을 조작해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협상을 허락받았다.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일본 국왕 책봉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히데요시를 만나게 됐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고니시와 심유경이 일본에서 이 문제를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천민 출신인 히데요시가 지독한 까막눈이며 잘 속이면 명나라의 칙서를 받아들일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글을 모르는 히데요시라 해도 일본 천하를 통일한 간교한 인물을 속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고야에서 열린 연회장에서 모든 상황이 들통나자 히데요시는 격분했고 결국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결국 다시 일본을 도망쳐나온 심유경은 감금되었다가 다시 풀려나 평화협상을 진행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일본 측을 더 이상 속일만한 카드가 없었다. 결국 일본으로 망명을 기도했던 심유경은 경상북도 의령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그의 사기행각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당시 명과 조선, 일본 3국간의 국제적인 평화협상 체계나 외교채널 전체가 얼마나 속이기 쉬웠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남게 됐다.


이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