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7.12.28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도시는 다른 생각이 만나는 공간, 대도시 서울 덕에 경제 기적 이뤄
이젠 창조성 일으키는 교류 줄고 소셜미디어는 끼리끼리 소통하며
타인의 다른 의견 무조건 맹공격… 다름을 나누는 '아고라' 있어야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인류 역사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비행기, 바퀴, 자동차, 전화기, 컴퓨터 등 많은 후보가 있었지만 영예의 1위는 '금속활자'가 차지했다.
금속활자 덕분에 작은 농장 12개 정도의 고가품이었던 성경책 가격이 뚝 떨어지게 되었고,
성경책이 보급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문맹률이 떨어지면서 르네상스와 시민혁명까지
가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류 최고 발명품으로 '도시'를 꼽는다.
도시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생각의 교류가 생겼고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로 발명과 발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창조는 다른 생각들이 만났을 때 스파크처럼 일어난다.
도시는 그러한 우연한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을 제공한다.
우리나라가 전후(戰後)에 기적처럼 경제 부흥을 이룬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건축의 관점에서 그 이유 중 하나를 들자면 전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상경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서로 만날 수 없었던 다른 지방 출신 사람들이 서울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교류하면서 근대화가 가능했다.
도시는 다양한 생각의 융합을 만들어내는 용광로이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한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들은 항상 세계적 도시를 가지고 있다.
로마제국은 로마, 프랑스는 파리, 영국은 런던, 미국은 뉴욕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융성하려면 대도시는 필수 요소다.
그리고 이 도시들은 저마다 도시 고밀화를 가능케 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로마는 상수도, 파리는 하수도, 뉴욕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서울도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도입해 대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대도시 서울은 서로 다른 다양한 생각들을 모아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서울의 이러한 장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현대 도시에서는 소통이 줄어들고 있다.
과거엔 이웃끼리 골목에서 만났다. 지금은 아파트 복도를 사이에 둔 이웃 사이에 소통이 사라졌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아파트 복도는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될 수 없다.
서울은 구(區)별로 소득 격차가 벌어지더니 이제는 폐쇄적인 아파트 단지별로 더 잘게 나뉘었다.
이 모든 것이 도시가 자동차 중심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폭이 넓어진 차도를 따라 먼 곳은 쉽게 갈 수 있게 됐지만
차도를 사이에 둔 블록끼리는 더욱 단절되었다. IT 기술이 발달하면서 또 다른 문제도 발생했다.
사람들은 상업 활동을 하면서 타인과 소통할 기회를 갖는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거래가 인터넷 전자상거래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전자상거래 비중은 2015년 50%를 돌파했다.
도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실생활 공간에서 상업 시설이 줄어들면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이는 도시가 가진 장점인 다양하고 우연한 만남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사람들 간 교류가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인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친구들과 술상을 엎을 정도로 어느 쟁점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술이 깨면 다음 날 다시 만났다.
지금은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람들하고만 모인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다 보니 그 생각이 전체 의견일 거라고 착각한다.
같은 당원끼리만 소통하는 정치가들이 자기들 생각을 '국민의 뜻'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파트 단지'별로 주민들이 나뉘는 것처럼 현대인은 끼리끼리만 모이는 '소셜 미디어 단지'에 갇혀 바깥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자신과 조금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맹공격을 퍼붓는다.
이런 폭력적 행위는 생각의 다양성을 죽이고 양극단으로 수렴하게 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화는 인간의 숨어 있던 폭력성을 극대화했고 이는 갈등과 반목을 양산했다.
인터넷은 다양한 생각의 교류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소셜 미디어가 기존 체제를 파괴하는 데는 효율적이지만 사회적 건설에는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했다. 소통의 단절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도시 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과거 그리스는 아고라와 원형극장이라는 건축양식을 만들어서 창의적인 사회의 꽃을 피웠다.
시장 바닥 같았던 아고라가 없었다면 그리스는 없다.
우리는 지금 다양한 생각이 만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21세기형 아고라와 원형극장'을 만들어야 한다.
새해에는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유현준의 도시이야기] (조선일보,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
건축가 유현준, MIT·하버드 학벌깡패? '모래시계' 때문이었죠 (조선일보 2018.01.05) 다양한 생각이 멸종하는 도시 (조선일보 2017.12.28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 (조선일보 2017.11.02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초고층 건물, '과시하는 인간'의 증거 (조선일보 2017.09.07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카페·노래방·편의점… 숨을 곳 찾아 헤매는 한국인 (조선일보 2017.07.13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
'文學,藝術 > 디자인·건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150] '중동의 문화 메카' 된 아부다비 (0) | 2018.01.08 |
---|---|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149] 설화 속 영물 백호와 반달곰 (0) | 2018.01.01 |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148] 거꾸로 매달린 크리스마스트리 (0) | 2017.12.25 |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147] '접이식 자전거'임을 알려주는 로고 (0) | 2017.12.18 |
[재미있는 과학] 가로세로 합체한 나무, 콘크리트보다 '튼튼' (0) | 2017.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