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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칼럼]직접민주주의 칼이 춤춘다

바람아님 2018. 8. 7. 09:56
동아일보 2018-08-06 03:00
       
한국 역사상 직접민주주의 가장 만개한 문재인 정부
청산의 칼 軍·외교·사법도 겨냥
선진 민주국, 직접민주주의 경계
포퓰리즘의 칼 춤추게 놔두면… 칼끝,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
           
박제균 논설실장

우리 역사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왕성하게 꽃피운 시대는 언제일까. 단연코 지금, 문재인 정부 때다. 민주주의가 없던 왕정 시절도, 직접민주주의 맹아(萌芽)도 찾기 힘들었던 권위주의 정권 때도, 보수 정부 때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광복이나 4·19혁명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절에 직접민주주의란 이름을 갖다 붙일 수도 없다. 작금의 직접민주주의는 현 정부와 가장 성격이 비슷한 노무현 정부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 성장과 질적 변화를 이뤘다.

먼저 노무현 정부 때에 비해 직접민주주의 장(場)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엄청나게 팽창했고 촘촘해졌다. 무엇보다 노무현과 달리 문재인 집권의 가장 큰 동력은 촛불이란 직접민주주의였다. 그 결과 문 대통령은 대놓고 직접민주주의를 국정 운영의 기조로 표방한다. 정권인수위원회 격인 국민인수위 보고서에서 ‘국민은 간접민주주의를 한 결과 우리 정치가 낙오되고 낙후됐다고 생각한다’며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표출했을 정도다.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직접민주주의의 만개(滿開)다. SNS 여론은 곧바로 정책이 되거나 청와대 청원이 돼 대통령까지 반응을 보인다. 시민단체와 재야, 노동계의 목소리는 정부의 각종 위원회 등을 통해 속도감 있게 정책으로 반영된다. 그것도 모자라 정책 결정을 시민들에게 맡기는 공론화 방식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SNS 여론은 때론 적폐청산이란 미명 아래 인민재판식 칼날이 되기도 한다.

직접민주주의 하면 떠오르는 고대 그리스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영웅들이 대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점이다. 마라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1차 페르시아전쟁을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는 정적들의 고발로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받고 죄인으로 죽었다. 전쟁사에 길이 남은 살라미스해전을 승리로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도 도편추방의 희생자가 돼 결국 적국 페르시아에 몸을 의탁해 거기서 숨을 거뒀다. 플라타이아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2차 페르시아전쟁을 끝낸 파우사니아스는 모함에 몰려 굶어 죽었다. 이 외에도 많은 지도자가 도편추방의 희생자가 됐다.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라고는 꿈도 못 꾸던 시절에 직접민주주의를 창안해 인류에게 큰 선물을 줬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것 때문에 망했다. 직접민주주의와 샴쌍둥이처럼 달라붙은 포퓰리즘과 중우(衆愚)정치 때문이다. 오늘날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이 간접민주주의인 대의정치를 대종(大宗)으로 삼고 직접민주주의는 일부 차용하되, 경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직접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은 참을성이 없다는 속성을 지닌다. 민의(民意)가 즉각 반영되는 듯해 시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전직 대통령 2명이 구속된 데 이어 이번에는 전직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관들에게도 칼날이 겨누어지고 있다. 정부기관의 인적 청산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열려서는 안 될 외교부의 판도라 상자까지 열릴 조짐이다.

외교관이 개인비리가 아닌 외교정책으로 처벌받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바닥인 우리의 외교력을 얼마나 실추시키는지 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 기무사령부 계엄 문건의 칼끝마저 전직 국방 수뇌부를 향하고 있다. 군(軍)과 외교, 사법 분야는 함부로 청산의 칼을 들이대다간 자칫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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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 부르는 무분별한 청산의 끝은 비극이다. 기원전 406년 펠로폰네소스전쟁 말미에 아테네는 해전에 참전한 사령관 8명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도망친 2명을 제외한 6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해전에서 패배한 것도 아니고 폭풍우로 침몰한 배의 선원을 구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런 나라가 패망하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역사학자들은 ‘아테네는 민주적으로 자살했다’고 평가한다.

직접민주주의와 동전의 앞뒷면인 포퓰리즘은 때론 피를 부르고 희생양을 요구하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1년 3개월이 됐지만, 적폐청산의 칼날은 무뎌지지 않고 점점 더 위험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 그 칼로 주류세력을 교체하겠다는 일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칼이 계속 춤추도록 놔두다간 그 칼끝은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