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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도시이야기] 동네 가게들이 공동건물主 되게 은행이 돕는다면…

바람아님 2018. 8. 9. 07:12

(조선일보 2018.08.09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동네 좋아지면 임대료 높아져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 심각
윤리적 문제로만 따지는 건 자본주의 根幹 해치는 일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무더운 여름엔 많은 사람이 도시를 비우고 휴가를 떠난다.

그래서 휴가는 영어로 '비운다'는 뜻의 '베케이션(vacation)'이다.

건축에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동네가 좋아지면 건물주가 임대료를 높여 기존 가게가 쫓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언론에서 여러 번 다뤄선지 많은 사람이 이 문제 해결 방법을 묻는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인간의 욕심과 관련된 문제이고, 인간의 욕심은 자본주의 사회를 받치는 기초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해결이 어렵다.

대체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의 초점은 임대료를 심하게 올리는 건물주에게서 찾는다.

직접적 원인은 거기에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더 벌 기회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간을 해치는 일이다.

유교의 뿌리가 깊은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자꾸 옳고 그름을 먼저 따지려 든다.

그리고 주로 어느 누군가의 윤리적 문제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윤리 도덕적 접근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적(知的) 자산을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가 만들어낸 문제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젠트리피케이션은 무엇보다 금융 시스템 문제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동네를 좋게 만든 가게 주인을

처음부터 임차인이 아닌 임대인이 되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안 되는 것은 이들에게 건물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건물을 살 돈이 없는 것은 담보가 없어 대출을 못 받기 때문이다.

담보를 만들려고 가게를 열심히 일해 성공시키면 임대료가 올라가서 돈을 벌 수가 없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유산을 상속받거나 대출받아 건물을 아예 사는 경우다.


상속은 사회가 해줄 수 없지만, 대출은 사회가 어느 정도 해결해줄 수 있다.

즉 좋은 가게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의 사업 계획을 보고, 건물을 살 수 있을 만큼 대출해주는 금융 시스템을 갖추면

젠트리피케이션 해결이 가능하다. 대출받은 가게 창업자는 안 좋은 동네 건물을 싸게 매입하고 사업을 시작한다.

가게가 성공하면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 모든 가게 주인에게 이런 기회를 주었다가는

은행이 망할 수 있으므로, 망하지 않을 좋은 사업 계획서를 선별하는 은행 내부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런 방법은 어떨까? 한두 번 젠트리피케이션 피해(被害) 경험이 있는 사업자에게 은행이 다음번 사업지에서는

건물을 사서 시작할 수 있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서울 삼청동을 좋게 만들었다가 쫓겨난 가게 주인이

지금 낙후한 지역에선 저렴한 건물을 사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두세 가게 주인이 모여도 좋다.

그렇게 하면 시(市)로서는 덤으로 이들을 도시 재개발 선봉장으로 얻게 된다.

은행이 자신 있다면 경력 없이 훌륭한 사업 계획서만으로도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다.


현재 세계적 기업들은 크게 석유 에너지 회사 또는 IT 회사이다.

석유 회사는 조상에게 천연자원이라는 유산을 상속받아서 된 하드웨어식 부자이고, IT 회사는 머리를 쓴

자수성가형 소프트웨어식 회사이다. 석유가 없는 나라가 살아남는 방법은 지적 재산을 갖고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무형(無形)의 지적 자산에 대해 정당한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유교 사회에서 지적 자산은 고상한 것이고, 그래서 무료로 나눠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은 좋은 선비 정신이다.

하지만 그 정신 때문에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에 이미 망했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요즘엔 생명체도 유전자 정보로 해석한다.

생명도 이제는 물질이라기보다는 정보로 읽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현대인은 실제 세상에서 생활하는 시간만큼이나 인터넷 가상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미 이 시대는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이끄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금융은 아직도 하드웨어만 담보로 여기고 하드웨어를 소유한 사람에게만 대출 혜택을 준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넘어서 이 사회의 계층 간 이동 사다리를 회복하려면 '무형의 생각'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회 경제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부동산 담보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유현준의 도시이야기]

(조선일보,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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