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유현준의 도시이야기]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비결

바람아님 2018. 10. 25. 08:24

(조선일보 2018.10.25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우리 도시는 공짜로 머물 만한 공원·벤치 등 휴식처 적으니 공유할 추억 없이 분열만 가속
전철역 근처에 공원 조성하고 옆 동네로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소통·융합 일어나 '뜨는 길' 될 것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대한민국 사회는 점점 분열되고 있다.

경제적 계층 간의 분열, 정치적 계파 간의 분열, 이제 심지어 남녀 간에도 분열되어 대립한다.

막장 드라마 같은 분위기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보면 이러한 분열이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도시의 공간 구조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대도시의 공간 구조는 국민 분열을 조장한다.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모든 공간은 움직여야만 하는 공간이다.

인도 위를 걸어야 하고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걸어갈 만한 거리에 공원도 없고 심지어 길거리에 벤치도 없다. 우리 도시엔 앉아서 쉴 곳이 없다.

앉으려면 돈을 내고 카페에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누구는 4100원짜리 스타벅스에 가고, 누구는 1500원짜리 빽다방에 가게 된다.

경제적 배경에 따라서 가는 공간이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한 공간에 있을 가능성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골목에서 앉아 이웃과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돈을 내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공통분모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뉴욕의 경우 가난한 월급쟁이나 백만장자나 똑같이 싸구려 핫도그를 사서 센트럴 파크에서 놀고,

브라이언 파크에서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고, 길거리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보면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쉰다.

이들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비슷한 추억을 공유한다. 그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커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도시에는 공짜로 즐겁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공유할 추억이 없고

그래서 서로 이해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상업 시설의 분포도 문제다. 최근에 재개발된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는 공원처럼 차도 없고 좋다.

하지만 문제는 주변의 거리다. 거리가 모두 아파트 담장으로 둘러쳐 있다.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폐쇄적인 단지 설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길거리에 가게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재개발이 되면서 모든 가게는 코너에 있는 4층짜리 상가에 다 들어가 있다.

상가가 만들어지면 옆 동네에 갈 일이 없어진다. 단지 주민들끼리만 모이게 된다.


과거에 만들어진 구반포나 동부이촌동 아파트 단지의 상업 시설은 연도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는 구반포에서 가게가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신반포까지 가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옆 동네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걷고 싶은 거리를 통해서 옆 동네와 소통되어야 하는데

반대로 상업 시설이 집중화되면서 옆 동네와 소통이 줄어들게 된다.


걷고 싶은 거리가 만들어지는 원리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한쪽에 지하철 역이 있고 1.5㎞ 정도 떨어진 곳에 공원이 있으면 그 사이를 연결하는 거리가 걷고 싶은 거리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이다. 이 길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임대료가 싼 조용한 동네였다.

그러다가 한강 르네상스를 하면서 한강 시민공원으로 들어가는 확장된 토끼굴이 가로수길 축 선상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하철 신사역과 한강 시민공원의 시너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로수길이 갑자기 뜬 것이다.


이 원리를 이용해서 서울을 소통하는 거리로 만들어보자.

우선 서울에는 여러 개의 지하철 역이 있다. 이 중에서 2호선 지하철은 서울을 한 바퀴 도는 순환선이다.

2호선 지하철 역과 역 사이에 공원을 하나씩 배치를 한다면 서울을 한 바퀴 도는 걷고 싶은 거리가 완성되고,

서울은 옆 동네와 소통하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때 한강에 보행자 전용 다리를 2개 정도 만들면 금상첨화다.

서울 강북과 강남은 웬만해서는 융화가 잘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한강을 건널 때 자동차나 지하철을 타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이건 걸어서 갈 때 경계가 모호해지고 융합된다.

2호선을 따라서 난 걷고 싶은 거리와 보행자 전용 다리가 있다면 서울은 지역 간에 소통이 늘어나고 격차가 줄어들 것이다.


기존의 한강 다리로는 사람들이 걷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옆에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천히 걸을 수 있을 환경에서 걷게 된다.

만약에 보행자 전용 다리를 당장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기존의 다리 하부의 교각에 가볍게 증축해서 만들어도 될 것이다.

혹은 지금 다리의 옆에 2m 정도만 낮춰서 인도를 부착해서 만들어도 된다.

그러면 자동차는 안 보이고 자연만 보이는 인도 위로 한강을 건너게 되어 강북과 강남의 공간적·사회적 융합이 일어날 것이다. 



불로그내 같이 읽을 거리 :


[김기철의 시대탐문] [6] 사회학자 이재열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 2020.01.29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해외선 산업·민주화로 한국 칭송, 내부엔 불신·불만·불안 가득
권력층이 앞장서 기성 제도 공격… 현대사 부정하는 교육도 한몫
폐허서 일군 성공 역사 일깨워야

http://blog.daum.net/jeongsimkim/39649


[기고] 산업혁명 종주국 영국이 '멘털 캐피털(Mental Capital ·정신적 자본)'에 꽂힌 이유
(조선일보 2020.01.28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미술사 박사)
http://blog.daum.net/jeongsimkim/39636


[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공원과 스타벅스의 차이
(조선일보 2019.12.20 유현준 홍익대교수·건축가)
서울은 돈 많으면 스타벅스, 적으면 빽다방
부자와 가난한 자, 한 공간 있을 가능성 낮아
뉴욕은 센트럴파크 산책, 브로드웨이 벤치…
경제적 배경 상관없이 공통의 추억 만든다
도심 속 소셜믹스는 '익명의 공간'서 이뤄져야
바둑돌 놓듯 몇 수 앞 보고 중요한 곳에 만들라
http://blog.daum.net/jeongsimkim/39123 


[유현준의 도시이야기]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비결 (조선일보 2018.10.25)
우리 도시는 공짜로 머물 만한 공원·벤치 등 휴식처 적으니 공유할 추억 없이 분열만 가속
전철역 근처에 공원 조성하고 옆 동네로 자연스럽게 연결돼야 소통·융합 일어나 '뜨는 길' 될 것
http://blog.daum.net/jeongsimkim/33303


[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9] 체임버 매직
(조선일보 2019.12.12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http://blog.daum.net/jeongsimkim/39005
  

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11] 벤치의 매직
(조선일보 2019.12.26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http://blog.daum.net/jeongsimkim/39236 


[우석훈의 달달하게 책 읽기] 특권이 불러온 교육 불평등 (조선일보 2019.09.07 우석훈 경제학자)


나 홀로 볼링 : 볼링 얼론-사회적 커뮤니티의 붕괴와 소생
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정승현 옮김/ 페이퍼로드/ 2009/ 718p
330.924-ㅍ25ㄴ/ [정독]인사자실/ [강서]2층


'더불어 함께' 모여 볼링 친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할까?

하지만 로버트 D. 퍼트넘 하버드 대학교(케네디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런 작은 방식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미국인들이 서로서로 다시 사회적 연계를 맺어야(38p),
미국 사회의 '공동체가 소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이 책이 간단명료한 주장이다.
http://blog.daum.net/jeongsimkim/37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