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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일의 퍼스펙티브] 잔뜩 흐린 한국 경제, CPTPP로 재도약 발판 삼아야

바람아님 2019. 1. 8. 09:21


중앙일보 2019.01.07. 00:04

 

수출 전선 이상과 무역전쟁으로 새해 혹독한 경제 한파 부는데
세계 3위 자유무역경제권에 한국이 빠진 건 말이 안 돼
일제 자동차 몰려올까 두려워 일본과의 FTA 반대하는 건 소비자를 봉으로 아는 행태

CPTPP 참여와 한·일 FTA 추진 최악 한·일 관계에 새 지평 열고
미래 먹거리 만드는 생존전략 공정경쟁·포용성장과 연계해야


한국 경제 생존법

지난해 연말 두 가지 뉴스가 날아들었다. 한국이 빠진 일본·캐나다·베트남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11개국이 참여한 자유무역협정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발효와 대한민국 역사상 첫 수출 6000억 달러 달성이다. 기록적 수출 증가에 힘입어 한국은 지난해 무역 1조1000억 달러라는 새 역사를 썼다. 세계 7위 무역 대국 한국은 새해에도 순항할 것인가.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 위기 이래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경제 버팀목인 무역이 새해에도 한국을 지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새로운 수출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에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수출 증가 이면에 확연히 드러나는 둔화 추세와 반도체 착시 현상이 그 우려를 대변한다. 수출 증가율은 재작년 15.8%에서 지난해 5.5%로 급속히 하락했다. 지난해 하반기로 갈수록 하락세는 완연했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지난해 수출 증가율은 0.6%에 그친다. 반도체 수출도 2017년 57.4%, 2018년 29.4%로, 상승세가 절반가량 둔화했다.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초 전월 대비 40~50%에서 9월 28.3%, 11월 11.6%로 계속 하락하다 지난해 12월엔 -8.3%를 기록했다. 월별 반도체 수출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은 2016년 9월 이후 2년 3개월 만이다.


각자도생 한국, 주력 수출품 위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한국의 최대 시장인 중국과 미국 경제의 거품이 꺼지며 본격적 하락세로 돌입했다는 경기 순환적 측면과 함께 미·중 무역전쟁이란 구조적 측면이 맞물려 한국의 무역 전선에 거센 역풍이 불고 있다. 지금 한국호 항로를 위협하는 역풍은 생산성 향상과 혁신적 제품만으로 뚫고 나가기엔 역부족이다. 세찬 바람이 잠시 불다 그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도체 호황은 끝났고, 자동차·디스플레이·통신기기 등 다른 주력 수출품은 중국의 거센 추격에 시장점유율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중국이 40년 전 개혁·개방으로 선회하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 기업들의 폭발적인 중국 투자로 시작된 ‘중국 공장(Factory China)’ 모델은 지난 25년 가까이 한국 제조업의 외연을 확장하고 성장시켰지만, 이제 상황은 돌변했다. 한국 경제 운용 방식인 ‘중국 공장’ 시대가 저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디지털 전환기의 세계사적 변곡점을 맞아 중국이 야심 찬 기술굴기 전략을 내세울 때부터 한국의 주력 제조업에 거센 역풍을 몰고 올 먹구름은 밀려오기 시작했다. 중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들은 시장 확보를 위해 기술을 교환하는 중국 방식을 수용해야 했고, 한국 기업의 투자가 늘수록 중국의 기술 획득 수준도 급격히 높아갔다. 한국 주력 수출품이 공통으로 겪는 것은 지난 역사의 누적된 결과이다. 중국은 국가적 전략으로 지속해서 산업정책을 추진해 왔고 한국은 기업 각자도생에 맡겨 온 차이가 누적돼 한국 주력 수출품의 위기가 초래된 것이다.


글로벌 가치사슬 → 지역 가치사슬 변화

중국의 기술굴기에 경쟁 압박을 받는 한국에 미·중 무역전쟁은 설상가상의 충격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중국을 세계 경제체제에 포용해 중국의 변화를 유도하려던 미국의 전략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중국을 고립시키고 중국의 패권 추구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힘겨운 시도이다. 그래서 미·중 무역전쟁은 쉽게 타협점을 찾기 어렵다. 잠시 휴전은 있지만, 종전은 없을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의 지속은 세계화 물결을 타고 형성된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을 와해시킬 것이다. 대신 지역 가치사슬(Regional Value Chain)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막 발효된 CPTPP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이 때문이다.


CPTPP는 일본·호주·캐나다·베트남 등 아시아 태평양 11개국이 참여한 자유무역지대이다. 인구 5억 명 이상,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2.9%, 교역량의 14.9%를 차지한다. 참가국들의 경제 규모로 계산하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경제 블록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 세계 무역 7대 대국, 무역의존도가 선진 경제권 중 가장 높은 국가인 대한민국이 빠진 CPTPP에 한국이 가입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CPTPP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현재는 11개국으로 출범하지만, 원래는 미국이 주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를 모체로 하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대중국 견제 전략의 목적으로 추진한 TPP는 2012년 일본이 전격적으로 협상에 참여하면서 중국의 동아시아지역 패권 추구에 맞서는 미·일 동맹의 양상을 띠었다. 2015년 10월 TPP는 타결했지만, 2016년 미국 대선 시기와 맞물려 미국 국내 비준이란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힘의 논리에 기반을 둔 양자주의를 선호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을 TPP에서 탈퇴시켰지만, 나머지 11개국은 그대로 남아 CPTPP를 만들어 내었고 지난해 비준 절차를 진행하여 발효에 이른 것이다.


한국, 어설픈 논리로 CPTPP 불참

일본의 참여로 TPP가 사상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된 2013년 초부터 CPTPP가 발효된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보인 태도는 수세적이었다. 한국이 TPP 협상에 참여할 기회의 문이 열렸던 2012년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부터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까지 한국 정부는 한국의 TPP 참여를 중국의 반대편에 선다는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 결과 한국의 입지는 축소됐고,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보복으로 중국으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처지가 됐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게 CPTPP는 레이더 바깥에 있었다. 문 정부를 포함해 역대 정부는 TPP나 CPTPP 참가의 실익이 크지 않다는 것을 불참의 이유로 내세웠다. TPP·CPTPP 참여국들이 일본·멕시코를 제외하면 한국과 이미 FTA를 체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CPTPP 가입은 일본과 FTA를 체결하는 것과 같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부는 CPTPP 가입 여부를 지난해 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해를 넘겼다. 무엇이 한국 정부를 주저하게 하는가. 농산물과 수산물의 추가 개방이 부담스럽다. 경제 상황도 어려운데 농어촌 반발을 초래할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긴 어려울 수 있다. 그간 FTA를 옹호해 왔던 대기업들도 시큰둥하다. 일본 시장에서 참패한 자동차 분야는 반대를 분명히 해왔다. ‘수출은 좋고, 수입은 나쁘다’란 중상주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면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게 된다.


관세율의 높고 낮음으로 FTA 협상의 유불리를 따지면 한국보다 낮은 관세율을 가진 미국·유럽연합(EU)과는 왜 ‘불리한’ FTA를 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FTA는 새로운 게임 룰을 쓰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미래의 현실이 된다는 ‘선형적’ 사고방식으로는 역사의 물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없다. 자본·유통망을 갖춘 선진국과는 경쟁하면 밀린다는 피해의식에 젖어있었다면 지금의 한류 열풍이 가능했을까. 국산 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줄이면 한국 영화가 망한다던 스크린쿼터의 경우, 2006년 절반으로 줄였지만 한국 영화는 더 강해지고 다양해졌다.


뉴노멀 시대 한국의 생존전략 고심해야

일본 자동차가 몰려오기 때문에 한·일 FTA를 반대한다는 것은 국내 자동차업계의 반대 논리가 될지는 몰라도 소비자와 혁신을 생각해야 할 정부 당국자가 숨을 그늘은 아니다.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인 한국 소비자들은 왜 국산 자동차를 미국보다 비싸게 사야 하는지 의아해한다. 오랜 세월 한국 시장을 닫고 국산 차만 열심히 사준 대가가 고용 승계를 고집하는 초강성 노조와, 생산성을 초월하는 초고임금으로 귀결된 데 대해 소비자들은 분노한다. 공정을 외치는 시대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공정·혁신을 내세우는 정부라면 한·일 FTA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국내 시장을 더 경쟁적으로 만들어 국내 가격에 낀 거품을 걷어내면 소비자의 실질소득을 올릴 수 있다. 경쟁을 촉진해 소비자 주권을 신장하고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비전을 담아야 한국은 전진의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말로만 ‘사람 중심 경제’를 외친들 고단한 서민의 삶이 나아질까. CPTPP를 수출 기회 확보, 경제 영토 확장으로 포장한다면 그것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포용적 성장을 갈구하는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다. 그 많은 FTA 체결에도 생필품 체감 가격이 내리지 않는 데 대해 한국 소비자들은 의아해한다. 이젠 개방의 혜택을 소비자에 돌려주어야 한다. 개방의 효과를 독점해온 중간 유통단계에 잔뜩 낀 거품을 걷어내야 가능한 일이다. 수입 제품과 국산 제품과 제대로 된 경쟁, 국산 제품 간의 제대로 된 경쟁에 소비자들은 목마르다. 기업가들도 목말라한다. 공정한 경쟁, 경쟁의 활성화가 이루어져야 창업 기반이 조성되고, 혁신성장도 시작할 수 있다.


CPTPP에 참여하면서 한·일 FTA를 추진하는 것은 최악의 관계로 방치돼 온 한·일 관계를 새 지평으로 끌어올리는, 한국의 전략적 선택이다.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의 야심이 구체화하고 있고, 그들의 기술굴기에 한국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데, 아무런 방파제, 아무런 기댈 언덕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다. 새해 한국의 CPTPP 가입 논의는 수출·수입 유불리를 따지는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뉴노멀 시대 한국의 생존전략을 고심하는 큰 그림과 연계돼야 혼돈의 시대에 희망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진실의 문 앞에 서 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리셋 코리아 통상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