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정민의 世說新語] [510] 약이불로 (略而不露)

바람아님 2019. 3. 15. 08:09
조선일보 2019.03.14. 03:15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덕무가 집안 조카 이광석(李光錫)의 글을 받았다. 제 글솜씨를 뽐내려고 한껏 기교를 부려 예닐곱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덕무가 이광석에게 답장을 썼다. 간추리면 이렇다. "옛날 수양제(隋煬帝)가 큰 누각을 짓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 놓고, 그 건물의 이름을 미루(迷樓)라고 했다더군. 자네 글이 꼭 그 짝일세. 참 멋있기는 하네만 뜻을 알 수가 없네. 얘기 하나 더 해 줄까? 어떤 이가 왕희지의 필법을 배워 초서를 아주 잘 썼다네. 양식이 떨어져 아침을 굶은 채 친구에게 쌀을 구걸하는 편지를 보냈다지. 그런데 그 친구가 초서를 못 읽어 저녁 때까지 쌀을 얻지 못했다네. 왕희지의 초서가 훌륭하긴 해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고 나서 이덕무는 이광석에게 글쓰기의 요령을 다음 네 구절로 압축해서 설명했다. "엄정하나 막히지 않게 하고 시원해도 넘치지 않게 한다. 간략해도 뼈가 드러나지는 않고 상세하나 살집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嚴欲其不阻 暢欲其不流. 略而骨不露 詳而肉不滿.)"

엄(嚴)은 글이 허튼 구석 없이 삼엄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뜻이 꺾이고 말이 막혀 의미 전달이 잘 안 된다. 할 말만 하더라도 이해를 방해해선 곤란하다. 창(暢)은 시원스럽게 할 말을 다 하는 것이다. 친절해서 모를 것이 없지만 자칫 과하면 글이 번지수를 잃고 딴 데로 떠내려가기 쉽다. 너무 삼엄해도 안 되고 너무 자세해도 곤란하다. 그 사이를 잘 잡아야 한다.

3구, 4구에서 한 번 더 반복했다. 약(略)은 군더더기 없이 간략한 것이다. 할 말만 남기면 짜임새가 야물지만 뼈만 남아 글의 그늘과 여운이 사라진다. 뼈대가 단단해도 피골이 상접한 해골바가지에 눈길이 가겠는가? 상(詳)은 꼼꼼하고 상세한 것이다. 꼼꼼하고 자세히 쓰면 속은 시원하겠으나 볼살이 미어터지고 똥배가 출렁출렁해서 보기에 밉고 거동이 불편하다. 맵시가 나려면 뼈가 다 보이는 갈비씨도 안 되고 살이 흘러넘치는 뚱보도 곤란하다. 부족해도 안 되고 넘쳐도 못쓴다. 중간은 어디인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