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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트로트의 재발견

바람아님 2019. 4. 9. 07:58

조선일보 2019.04.08. 03:16


1920년대 나신 아버지는 '애수의 소야곡'을 즐겨 부르셨다. 한잔 술에 거나해지신 저녁이면 반듯한 이마를 반쯤 숙이시고 낮게 곡조를 풀어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물끄러미 노래를 들으시던 어머니는 첫 대목부터 못마땅하셨다. 샐쭉한 목소리로 어깃장을 놓으신다. "당신이 눈물로 기다리는 '옛사랑'이 대체 누구예요?"


▶아버지가 뭐라 대꾸하셨는지 기억에 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이 노래를 '집안 금지곡'으로 정하셨다. 해방동이부터 베이비붐 세대까지인 자식들 귀에 트로트는 구슬프고 청승맞았다. 학창 시절엔 '빌보드 차트'니 '헤비메탈'이니 하고 떠들면서 레드 제플린, 에릭 클랩턴, 비틀스, 아바, 산울림, 양희은 테이프를 끼고 살았다. 트로트는 아예 '부모님 전용'이었다.


▶80년대 직장에 들어오니 노래방 곡명만 봐도 누구 선곡인지 다들 알았다. 부장급 위로는 트로트, 밑은 발라드였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울고 넘는 박달재'를 고르는 신입은 없었다. 복학생 때 막걸리집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를 떼창으로 불렀던 게 트로트 경험의 전부였다. 그랬는데, 어느 날 영화 '국제시장'을 보다 그 속에 나오는 트로트가 아릿하게 가슴을 후벼팠다. "맞아, 그때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살았어" 하는 재발견 같은 거였다.


▶TV조선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이 종편 예능 부문에서 시청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주 목요일 밤 11.18%를 찍었다. 경쟁 채널이 갖고 있던 10.75%를 넘어선 것이다. "중장년층이 좋아하는 트로트를 젊은 층에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접목해" "모든 연령대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트로트에는 시대상과 당대인의 삶이 녹아든다. 방송 출연자가 털어놓는 다채로운 인생사가 기막히게 어울릴 때도 많다.


▶'비내리는 호남선'에서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는 답을 몰라 묻는 게 아니다. 삶이 하도 팍팍하고 시려서 울먹이는 중이다. 그게 트로트다. 문인들이 최고 대중가요로 뽑은 '봄날은 간다'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말머리를 튼다. 소설가 김훈 말처럼 여기서 백미는 '~더라'다. 치맛자락을 흔드는 바람조차 내 탓이 아니라고 거리를 둬야 했던 애환이 서럽다. '미스트롯'은 애초 "한물간 트로트를 사람들이 볼까?" 하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그랬는데 그야말로 대박으로 판명 났다. 고달픈 삶에 위로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