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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 기행] 센강 맴도는 '햇살의 궤적'에 마음의 그늘도 지우다

바람아님 2014. 1. 10. 15:18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의 '노트르담 대성당 옆으로 흐르는 센강'

화폭의 반이 넘는 '드넓은 하늘'…낮은 곳에서 바라본 독특한 구도
네덜란드 화풍으로 그린 파리…마네·모네·피사로도 매료돼

파리의 명소에서는 좌판을 깔고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을 판매하는 화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미래의 대가를 꿈꾸며 외국에서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로 파리의 엄청난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부득불 '알바'에 나선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젊은이들은 노트르담 성당 주변에서도 예외없이 볼 수 있다. 허가증이 있는 화가만 그림을 제작하고 판매할 수 있는 몽마르트르 지구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제3세계 출신 유학생들의 그림을 쉽사리 만날 수 있다.

파리 체류 시절 나는 이들의 작품에 흥미를 느껴 자주 노트르담 대성당 주변을 맴돌곤 했다. 동구,남미,혹은 아프리카에서 온 젊은이들의 그림 속에서는 서유럽 화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미적 감각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작 당사자는 자각하기 힘든 토착미의 원형질로 이방인들에겐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1819~1891)라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에 매료된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로테르담 부근의 국경마을 라트롭에서 태어나 헤이그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용킨트는 돈과는 지지리도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1846년 청운의 뜻을 품고 파리의 몽마르트르로 이주한 그는 외젠 이자베의 화실을 드나들며 프랑스 근대 회화와 처음으로 만난다. 1848년부터 출세의 등용문인 살롱전에 잇달아 출품한 그는 1852년 3등상을 거머쥐면서 파리 화단에 당당히 이름을 알린다.

한창 문명을 날리던 샤를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는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발표했다. 마네와 모네,피사로 등 훗날 인상파의 전위가 될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그의 화풍에 깊은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쥐구멍에 볕은 들었지만 배고픔은 여전했다. 낙담한 그는 점차 술에 의지하고 급기야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1855년 마음을 다시 추스른 용킨트는 일거리를 찾아 향리와 가까운 로테르담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한시도 파리를 떠나지 못했다. 5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 그는 임대료가 싼 몽파르나스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묵묵히 화가의 길을 간다. 훗날 인상주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그의 화풍이 만개한 것은 바로 이 '눈물의 빵'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센강 주변을 맴돌며 한낮의 햇빛이 건물과 나무들에 떨어져 반사되고 굴절되는 과정에서 펼치는 빛의 다이내믹한 궤적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이것을 화면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대상의 고유한 색채는 다양한 뉘앙스를 풍기며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이는 새로운 조형 어법을 갈구하던 인상주의의 전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용킨트는 인상주의자들처럼 야외에서 그림을 완성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선배들처럼 야외에서 스케치한 후 아틀리에에 들어가 작품을 마무리했다.

게다가 그는 파리의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낮은 시점의 설정,드넓은 하늘 공간의 배치 등 네덜란드 해양풍경화의 전통을 계승했다. 인상주의자들이 기존 회화 전통을 전면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 데 비해 용킨트는 전통의 둥지 속에서 혁신을 모색했던 것이다.

1864년에 그린 '노트르담 옆을 흐르는 센강'에는 이러한 화가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시테섬의 남쪽을 흐르는 센강변에서 바라본 노트르담 대성당과 생 미셸 다리를 포착한 이 그림은 화면 상단의 3분의 2를 푸른 하늘에 배분하고 있어 늘상 보던 광경도 어떻게 구도를 잡느냐에 따라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색다른 느낌은 한낮의 빛을 머금은 시가의 건물과 석조 다리가 본래와는 다른 색조로 표현됨으로써 증폭된다. 센강도 물의 표면이 가장 넓게 보일 수 있는 지점을 택해 묘사하고 그 위에 곤돌라 같은 배를 띄워 마치 물의 도시 암스테르담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빛으로 충만한 그의 그림 속에서 빈곤으로 인한 마음의 그늘은 찾아보기 힘들다. 해가 갈수록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지만 그는 더 이상 실의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 당대의 미술비평가 푸르코가 그를 방문했을 때 엄청난 양의 수채물감으로 그린 야외 스케치를 쟁여 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통 관리를 하지 않아 심각한 훼손 위기에 처해 있었다.

푸르코가 안타까운 마음에 이것들을 잘 보관할 것을 충고하자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것은 자연이 내게 준 선물이라오.자연은 내가 원하면 언제든 그 10배를 내게 줄 것이오." 힘겨운 현실을 그는 특유의 낙관주의로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년의 용킨트는 그르노블 부근의 라 코트 생 탕드레로 이주해 농민들의 진솔한 삶을 화폭에 담으며 달관의 세월을 보낸다. 1891년 용킨트가 세상을 떠나자 열 달 만에 그의 그림 값은 한 점에 3만프랑을 호가할 만큼 치솟았다. 생전 1년에 벌어들인 돈의 1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때때로 운명의 장난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정석범 미술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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