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훈 문화부 차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자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다짐"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제국주의 일본의 역사에
무지해 한 말이라면 모를까 알고서도 그런 말을 했다면 거짓을 가리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야스쿠니에 합사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도조 히데키만
해도 도무지 평화의 다짐을 할 대상이 아니다. 도조는 육군대신(大臣)이던 1941년 장병들에게 내린 '전진훈(戰陣訓)'이란 훈령에서 '생사를
초월해 오로지 임무 완수에 매진해야 한다'고 했다. 진주만 공격을 11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가타야마 모리히데 일본 게이오대 교수는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 이유를 밝힌 책 '미완의 파시즘'에서 이를 '육체는 죽어도 혼은 이를테면 야스쿠니 신사에서 계속 살아가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가치관'이라고 해석했다. 도조는 일본 군인들에게 "전쟁에 나가 죽으라"고 한 사람이다. 아베는 그런 사람 앞에서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걸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니 억지이거나 궤변이다.
같은 전범국인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히틀러의 혼백에 절한
뒤 "부전(不戰)을 다짐했다"고 주장하면 정신병자 취급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독일 총리가 히틀러에게 참배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독일 국민이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베의 뒤에는 전범을 추모하는 그에게 박수 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오바마 1기 행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람 이매뉴얼 미국 시카고 시장은 유대인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그의 모친은
독일 물건은 사지도 쓰지도 않았고, 독일 땅을 밟는 것조차 거부했다. 1971년 유럽 여행 때는 룩셈부르크에서 다음 목적지인 덴마크로 가는 사이
중간에 끼어 있는 독일 땅을 밟지 않기 위해 자동차를 빌려 타고 독일 땅 580㎞를 무정차로 통과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매뉴얼가
형제들'이란 책에는 독일에 대한 이매뉴얼가(家)의 이런 분노가 용서로 바뀌는 계기가 된 사건이 실려 있다.
람의 큰형이자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인 에제키엘이 1990년대 중반 독일학회의 초청을 받았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안 독일 측 참가자들이 하나 둘 다가와
"미안하다"고 반세기 전 잘못을 사과했다. 노학자는 물론이고 20대 학생까지 그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국가 차원의 사과는 벌써 있었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독일 국민까지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걸 보면서 그는 독일을 용서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 화해의 경험을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아베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까지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일본 국민 사이에서 전쟁과 식민
통치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설사 아베가 더 이상 참배를 하지 않더라도 제2, 제3의 아베가 나타나 야스쿠니에서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우리도 이매뉴얼가처럼 용서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그러려면 일본 국민이 행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