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7.07.13 도쿄 선우정특파원)
(2007.07.13)
아베 日총리의 추락, 이유가 있다
총리 지낸 외할아버지 외상 지낸 아버지 의식한 듯
“뭔가 보여주겠다” 마음만 앞서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의 지지율이 30% 밑으로 추락하고 있다. 일본 정가에서도 지지율 30%는 권력 유지의 마지노선을 뜻하며, 밑으로 내려가면 정권 내부에서 후계 논의가 시작된다. 아베 내각은 작년 9월 출범했다. 당시 지지율은 60%를 넘었다. 마치 노무현 정권의 초기 페이스를 떠올리는 하강 속도다.
사상적 지향점은 정반대이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가 잃어가는 과정도 흡사하다.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면서 아베 총리를 살피면 정반대 위치에 있는 지도자가 서로 어떻게 닮아가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지지율이 떨어지자 일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소리가 “역시”다. “우려한 대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정계·언론계가 이구동성이다.
아베 총리는 ‘일본 정치의 황태자’란 소리를 들었다. 지지율 하락으로 빛이 바랬지만 그의 가계에는 기시 노부스케 총리(외할아버지), 아베 신타로 외상(아버지) 등 쟁쟁한 정치가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다. 아베는 덕분에 총리가 됐다. 아베 총리에겐 ‘봇짱(도련님)’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저절로 재상이 됐다는 뜻이다. 일본 국민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총리가 된 다음엔 도련님 이상의 뭔가를 하겠지’라고 기대했다.
- ▲ 아베 내각의 지지율 추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아베 총리의 ‘도련님 콤플렉스’는 노 대통령의 ‘자수성가 콤플렉스’처럼 지지율을 스스로 내리누르는 심리적 핸디캡으로 작용하고 있다. 종류는 다르지만 ‘풋내기 정치’, ‘오기 정치’로 나타나는 결과물은 비슷하다.
◆언론과의 싸움
노무현 대통령의 타깃은 조선일보이지만 아베 총리의 상대는 아사히(朝日)신문이다. 위기에 몰릴수록 아사히신문을 꼭 찍어 비판한다.
“몇 주 전 아사히신문에 ‘아베 총리, 공무원제도 개혁 단념’이란 기사가 1면 톱으로 나왔다. 왜 이런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그것은 (개혁에) 저항하는 관료에게 취재했기 때문이다.”(6월 30일 연설)
“완벽한 날조, 중상이다. 나(아베 총리)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보도해도 좋고, 날조라도 좋고, 조작해도 좋다는 생각이 만약 아사히신문에 있다면, 무서운 일이다.”(5월 18일 기자회견)
아사히신문 정책 기사의 오보와 아사히 계열 주간지의 의혹 제기에 대해 아베 총리가 발언한 내용이다. 아베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아사히신문의 오보 탓”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총리가 공식 석상에서 특정 언론사를 거명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일본 역시 다른 이유를 떠나서 ‘총리의 격(格)’에 맞지 않는 일이다.
아베 총리의 비판은 아사히신문이 자신이 대변하는 보수우파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맞았건, 틀렸건 아사히신문은 안보, 역사, 정치, 경제 등 사안마다 자민당 보수우파의 반대 노선을 주장해 왔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는 자민당 골수 보수의 원조이고, 아베 자신은 후계자다.
하지만 그의 비판적 언론관은 꼭 아사히신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취임 직후 하루 두 차례 열리던 기자회견을 한차례로 줄였다. 총리 관저 기자실 게시판에는 당시 기자실 명의로 관저에 제출한 항의문이 지금도 붙어 있다. 기자회견 때 기자를 보던 시선도 최근 TV 카메라로 돌렸다. “나는 기자들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 직접 말한다”는 뿌리 깊은 언론 불신을 반영한 것이다.
대신 TV화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출 수 있는 퍼포먼스는 열심히 한다. 미녀 아나운서와 쓰레기 줍기 행사에 참여한다든가,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양궁 실력을 보여준다든가, 라디오에 출연해 유명 쇼 프로그램 진행자와 담소를 나누는 식이다.
일본 언론사의 한 기자는 “일본 보수파가 정권을 잡고도 50년 동안 헌법 개정을 못 한 것은 야당은 물론 언론 탓이란 인식이 뿌리 깊은 듯하다. 언론에 밀리지 않으려는 강박 관념이 총리의 입지를 더더욱 좁히고 있다”고 말했다.
◆물정 모르는 브레인
미국 하원의 일본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앞두고 일본은 코미디를 벌였다. 보도된 대로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광고를 워싱턴포스트에 실었다가 결의안 통과시기를 앞당기는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이 광고에는 오카자키 히사히코 전 태국 대사와 사쿠라이 요시코 원로 저널리스트 이름이 올랐다. 두 사람은 ‘아베의 선생님’으로 불린다. 아베 총리가 지난 4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면서도 “20세기는 인권 침해의 시대”라는 뼈 있는 사족(蛇足)을 달아 부작용을 낳은 것도 오카자키씨의 조언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다.
오카자키씨는 6월 강연에서 이 말을 이렇게 설명했다. “20세기에는 중국에서 수천만 명이 살해 당했다. 스탈린 숙청도 수백만 명,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영국의 (독일) 드레스덴 폭격이 있었다. 위안부 따윈 문제도 안 된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신임은 변치 않고 있다. 아베 총리가 미국 방문처럼 중요한 외교 무대에 서기 전에 반드시 조언을 구하는 상대가 오카자키씨다. 이런 사람들의 말만 들으니 총리에서 장관까지 세상 인심과 동떨어진 결정적인 말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지난달 말 규마 후미오 전 방위상(방위청 장관)의 “원폭은 어쩔 수 없었다”는 발언도 “일본의 핵무장론을 정당화하는 발언”으로 해석하는 언론까지 있었다. 정권의 성향이 너무 ‘우 편향’이기 때문이다.
◆제 식구 감싸기
사실 언론과의 싸움이나 역사 발언이 직접 지지율을 끌어내렸다는 증거는 없다. 최근 지지율 하락의 직접 원인이 연금기록 누락 사건과 장관들의 정치자금 문제라는 것은 누차 보도된 대로다.
하지만 여론조사를 잘 들여다보면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을 다루는 총리의 대처 방식에 국민들이 더 큰 불만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를 보면, 연금 문제에 관한 대처가 “충분하지 않다”는 응답이 78%, 정치자금 문제에 관한 총리의 대응이 “적절하지 않다”는 응답이 69%에 달했다. 아베 총리의 어떤 대처와 대응을 말할까?
아베 총리는 최근 연금 관련 법안을 중의원에서 야당 반대 속에 여당 단독으로 처리했다. “심의가 부족하다”는 여론을 무시한 것이다. 하지만 보다 큰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은 “여론에 밀리지 않겠다”며 시종일관 제 식구를 감싸는 태도다.
예를 들어 규마 전 방위상의 원폭 발언도 처음엔 “미국의 입장을 얘기한 것”이라며 별것 아닌 일로 넘기려 했다. 원폭 피해지역과 언론, 야당의 비판이 이어지자 이번엔 그를 총리 관저로 불러 ‘엄중 경고’ 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다 여당 내에서 “이러다 선거에서 참패한다”는 비명이 들리자 일주일 만에 규마 방위상을 경질했다. 그리곤 쇼를 하듯 앵커 출신 여성 보좌관을 방위상 자리에 앉혔다.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상의 자살 사건도 “여론과 야당에 밀리지 않겠다”는 총리의 고집이 낳은 비극이란 인식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 뿌리 깊다. 아베 내각의 지지율 급락은 바로 여론을 유연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경직된 자세에서 출발한 것이다.
◆개혁 강박증
아베 총리가 노 대통령과 가장 닮은 점은 ‘꼭 뭔가 이루려는 강박 관념’이다. 업적을 만드는 거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무리한 일에 고집을 부리면 국민이 피곤해진다.
아베 총리의 경우 헌법 개정과 교육 개혁을 그렇게 밀어붙이고 있다. 정권이 출범한 지 1년이 안 됐는데 헌법 개정의 전 단계라고 볼 수 있는 국민투표법, 교육기본법과 교육 관련 3법, 공무원 개혁법 등 굵직한 법들이 국회를 통과했다. 대부분 야당의 반대 속에 이뤄졌다.
이들 가운데에는 일본 사회에 정말로 필요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꼭 지금 할 것도 있고, 나중에 해도 충분한 것들도 있다. 문제는 총리 관저를 중심으로, 언론과 야당은 물론 관료까지 ‘왕따’ 시키면서 무슨 혁명하듯 밀어붙이는 아베 정부의 태도다. 총리 관저 보좌관에는 아베 총리와 사상을 함께 하는 ‘우익 386’이 포진해 있다. 청와대가 움직이는 각종 위원회로 국정을 좌지우지한 노 정권을 연상시킨다.
- ▲ 도쿄=선우정 특파원
술자리에서 만난 자민당의 한 국회의원은 “정권 출범 후 1년은 아베 총리가 ‘도련님 콤플렉스’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 기간인 듯하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뒤를 노리는 자민당 아소 다로 외상과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대표 역시 정치인 가문의 ‘도련님’ 출신이다. 하지만 오랜 사업 경력과 정치 경력으로 콤플렉스를 완전히 벗어낸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다만 요즘 유행어로 외모가 ‘비호감’이라 국민의 선호도가 여전히 ‘아베 도련님’만 못하다. 그래서 아베 정권이 선거에서 패배해도 좀 더 오래갈 수 있다는 견해도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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