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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최후 격전지 '항파두리성' 실체 드러내다

바람아님 2014. 3. 26. 09:32
    1977년 정확한 고증없이 유적지 조성


시, 4년전부터 발굴·2016년까지 정비

토성길이 고문서엔 6㎞ 실측뒤 3.8㎞

고려 갑옷·무기류 한반도 첫 발견

삼별초 입도에 대한 평 엇갈려

"전시관엔 제주도민 시각반영돼야"


741년 전인 고려 원종 14년(1273년). 인천 강화도와 전남 진도에서 항전하다 제주도로 쫓긴 삼별초가 1만2000여명의 여몽연합군에 맞섰던 최후의 격전지이자 대몽항쟁의 종착지. 몽골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사적 제396호)에 서린 역사다. 해발 200m쯤에 있는 항파두리 유적지는 제주올레 16코스가 걸쳐 있어 올레꾼이 간간이 스쳐지나가곤 한다.

지난 8일 순의문 안 광장 한쪽에 지난해 제주고고학연구소가 발굴 작업을 벌인 2000㎡ 현장이 푸른 덮개로 뒤덮여 있었다. 제주고고학연구소 김용덕(39) 연구부장은 "순의문 안이 내성지였던 곳으로, 삼별초 군사지휘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발굴 작업이 조금씩 진전하면서, 740여년 전 제주도에 3년 가까이 웅거했던 고려시대 삼별초의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고 있다.

항몽 유적지는 1270년부터 여몽연합군에 항파두리성이 함락되는 1273년까지 3년 가까이 활동했던 삼별초의 근거지였다. 내성과 외성(토성)으로 이뤄진 항몽 유적지 외성 주변은 고성천과 소왕천의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변의 오름 등은 이곳이 천혜의 요새지였음을 보여준다.

유적 발굴 현장에선 나뭇잎 모양이 담긴 기와 파편들이 발에 걸릴 정도로 수북했다. 모두 삼별초군이 항파두리에 있을 때 만들거나 한반도에서 가져온 기와들이다. 유물에서 제외된 기와 파편 등도 광장 구석에 쌓여 있었다.

지난해 10월 항몽 유적지 내성지에서 발굴 조사를 하던 김 부장과 윤중현(36) 연구원 등이 트라울(흙을 파는 발굴도구)로 10㎝ 깊이 땅을 파다가 뭔가가 걸렸다. 솔로 털어내자 조금씩 형체가 드러났다. '철제 갑옷' 파편이었다. 김 부장은 "그때의 쾌감은 말로 할 수가 없다. 못 보던 유물을 찾아낸 느낌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원들은 흙을 1~2m쯤 걷어내고 다시 10~20㎝를 파고 들어가 철제 갑옷 파편과 청동촉, 청동바늘, 철제 솥, 청자류, 청백자 등 1000여점의 각종 유물·유구를 발굴했다. 터를 확인한 건물도 12동에 이른다. 이곳에 삼별초의 최고 지도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윤 연구원은 설명했다.

이와 함께 청자 두침(베개), 접시, 대접 등 청자류, 만(卍)이 새겨진 명문기와 파편과 벽돌 조각 등도 확인됐다. 북방계 놀이문화였던 고누놀이판과 윷놀이판 같은 중요한 민속고고학 자료도 나왔다.

순의문에서 외성인 '토성'의 복원 현장에 가보니 애월읍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로 상륙하는 여몽연합군을 감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임을 알 수 있다. 토성 길이는 몇몇 고문서에 6㎞로 나와 있으나, 최근 실측한 결과 3.8㎞인 것으로 조사됐다. 너비는 10m 안팎이고 높이는 최고 3m다.

정광중 제주대 교수는 "지금까지 항파두성을 비롯한 항몽 관련 유적지 발굴이 몇 차례 시도된 적이 있지만 이처럼 많은 건물지와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된 적은 없었다. 특히 고려시대 찰갑(갑옷)과 무기류의 발굴은 한반도에서조차 발굴된 사례가 없어 무기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전쟁유물"이라고 말했다.

항몽 유적지 조성 사업은 1977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은 호국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며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대대적으로 관련 유적을 찾아내 보수하는 작업을 벌였다.

항파두리 유적지도 그 산물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 지시로 정확한 조사나 고증 없이 정비사업이 일사천리로 추진됐고, 준공 뒤에는 정부 인사들이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들르는 '호국의 성지'로 성역화됐다. 박 전 대통령은 1978년 6월 준공식까지 세 차례나 항파두리 정비사업 현장을 찾았다. 2000년 9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남쪽에 왔다 제주도를 방문했던 북한의 고 김용순 노동당 비서도 항파두리를 방문해 삼별초의 투쟁을 기리는 글을 방명록에 남겼다.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정벌한 뒤 원나라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해(1273년) 100년 이상 제주를 지배했다. 제주도가 '말의 고장'이 된 것도 이때부터였고, 유배문화, 장례문화 등에도 몽골의 풍습이 스며들었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온 것을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당시 탐라민(제주도민) 처지에서는 삼별초나 몽골 모두 외세라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국사적으로는 대외항쟁의 자주성을 보여준 항전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고려사를 전공한 김일우(52) 박사는 제주도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제주도가 한국의 역사에 정면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됐으며, 민족사적인 면에서는 외세항쟁사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동전 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제주의 역사는 삼별초 입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처음 진주할 당시 해방군으로 인식됐지만, 각종 노역에 원주민들을 동원하면서 민심을 잃게 됐는데, 제주도민들은 삼별초나 몽골로부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전시관을 만든다면 민족사적 측면만이 아니라 제주민의 시각도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시는 2010년부터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항몽 유적지는 110만559㎡ 가운데 86만7615㎡가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됐고 나머지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시는 2012년 항파두리 항몽 유적 종합정비 계획을 세워 2016년까지 발굴조사 21억원, 토지매입 11억원, 복원·정비 39억원 등을 들여 정비에 나섰다. 김나영 제주시 학예연구사는 "내성지 시굴조사 결과 건물지가 드러나 발굴조사로 전환됐다. 종합정비 계획은 내성지 발굴 이전에 수립된 것이어서, 유물·유구 등의 발굴 결과에 따라선 정비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발굴 예산은 빠듯하다. 2000㎡를 발굴하려면 3억원 이상 소요되는데, 올해 발굴 예산은 2억1000만원만 편성됐다. 연구소나 제주시 쪽도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박찬식(53) 역사학자는 "제주도에 왔던 삼별초가 일본 오키나와까지 갔다는 얘기도 있다. 항몽 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작업을 통해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 시각에서 국내외 사례들을 비교연구하고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은 "현재 발굴 면적은 전체 내성지의 15~20%에 불과해 앞으로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할수록 고려시대 삼별초의 비밀들이 드러날 것이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복원 및 보존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유적지 보존·복원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머물렀던 강화도의 고려도성, 진도의 용장성, 제주 항파두리성 등 3개 섬 지역을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해봄직하다는 의견도 고개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