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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기행] 왁자지껄 항구에 생뚱맞게 들어선 로마 신전…'유쾌한 상상의 모자이크'

바람아님 2014. 6. 28. 21:35
● 위베르 로베르의 '리페타 항구'

고대 그리스·로마 건축적 기념물과 동시대 건물 나란히 그린 '카프리초'
과거 榮華 재현하고 싶은 바람 담아                

18세기 후반 파리 화단은 한 괴짜화가의 등장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754년 로마에 유학 갔다가 11년 만에 돌아온 위베르 로베르(1733~1808)라는 이 화가의 그림은 전통 회화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특이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 의미와 가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그림에 호감을 표한 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로베르가 귀국 이듬해인 1766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에 전격적으로 선출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살롱전에 출품한 '리페타 항구'가 호평을 받은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계몽사상가로 유명한 디드로가 자신의 정신을 각성시켰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은 걸 보면 이 그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그림의 제목인 '리페타 항구'는 로마 서쪽의 테베강에 있던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말이 항구지 실은 간단한 부두시설이 갖춰진 약간의 격식 있는 나루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내륙 항구는 교황청이 수로를 통한 교역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교황령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1707년 알레산드로 스페치에게 명해 건설하게 한 것이다. 로마의 중심에서 바티칸으로 연결된 카보우르 다리 우측의 보르게세 궁전(보르게세 정원과는 별개의 장소다) 앞에 있었다.

그림을 보면 중간에 바로크풍의 독특한 계단이 있고 그 아래 부둣가엔 작은 배 두 척이 있다. 항구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뱃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하고 있는 모습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그 주변의 건물들이 왠지 낯설다. 궁전처럼 화려한 건물과 신전이 왁자지껄한 항구에 바로 면해 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곳은 정말 그림의 제목대로 '리페타 항구'를 그린 것일까.

18세기 로마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동판화로 재현했던 쥐세페 바시(1710~1782)의 작품 '리페타 항구'는 우리에게 확실한 답을 준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로베르의 작품은 바로크풍의 계단을 빼고는 전혀 엉뚱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우측엔 산 지롤라모 데이 크로아티 성당이 있어야 하는데 화가는 그 대신 로톤다 광장에 있는 판테온(만신전)을 떡하니 옮겨다 놓았고 왼쪽에는 캄피돌리오 광장에 자리한 누오보 궁전(또는 세나토리오 궁전)의 모서리를 은근슬쩍 배치해 놓았다. 게다가 그 뒤편에는 보르게세 궁전이 약간 변형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다. 그는 현실의 풍경을 마치 모자이크하듯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사실 이런 그림의 원조는 로베르의 스승인 조반니 파올로 판니니(1692~1765)였다. 그는 폐허가 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당대의 건축물들과 절묘하게 배치하기를 즐겼는데 여기서 폐허는 화려한 인간 문명도 결국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시간의 무덤 속에 묻히고 만다는 화가의 생각이 투영된 것이었다.

그의 그림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는 건축물들을 한자리에 배치하는 착상의 기발함으로 인해 '카프리초(기발한 상상에 의존한 건축적 그림)'라 불렸고 당대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의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된 데는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그리스 · 로마의 고대문화에 대한 관심이 한창 고조되고 있었는데 계몽주의적 지식인들은 고대 로마문명을 '자연'과 '합리성'이 결합된 이상적인 사회로 인식했으며 왕정을 대신할 새로운 문명의 모델로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는 당시 폼페이와 헤라클레눔 같은 고대 로마 도시의 발굴을 통해 화려한 고대 문명의 실체가 밝혀진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이는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과 '그랜드 투어'라는 현지 여행 붐으로 이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 판니니의 그림은 여행객들의 갈구를 충족시킬 온갖 요소를 갖췄기 때문에 입도선매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것이다.

판니니 밑에서 배우며 이 모든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간파한 로베르는 귀국을 미룬 채 피라네시 같은 폐허 이미지의 대가들과 교유하는 한편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폼페이를 비롯한 고대 문명의 흔적들을 낱낱이 스케치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한 착실한 정지작업이었다.

그러나 로베르는 건축물의 사실적 묘사에 치중한 스승 판니니의 화풍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여기에 시적인 정서를 부여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했다. 판니니가 고대문명을 동시대 문명과 대비시켜 현세의 무상함을 강조한 '공자님 말씀' 같은 그림이었다면 로베르의 그것은 고대의 건축적 기념물과 동시대의 건축물을 나란히 배치하고 그 사이에 유쾌한 현세의 삶을 녹여 넣은 따스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현세의 감각적 아름다움을 예찬했던 '로코코'라는 시대정신에 대한 화답이기도 했다.

'리페타 항구'는 로베르의 그런 생각들이 압축된 초창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계몽주의의 확산 분위기 속에 서서히 혁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던 프랑스에서 고대 로마 문명의 영화를 담은 그의 작품이 환영받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점차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던 구귀족들에게 로베르의 그림은 과거 영화의 재현에 대한 바람을 담은 그림으로,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신흥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겐 왕정을 대체할 새로운 문명의 모델을 제시한 그림으로 읽혀졌던 것이다. 그는 결코 괴짜화가가 아니었다. 일찌감치 시대정신을 꿰뚫고 자신의 시대가 꿈꾸던 이상을 시각이미지를 통해 제시한 선구적 화가였던 것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