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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표절 문제와 언론윤리

바람아님 2014. 7. 27. 11:27
박찬구/서울대 교수·윤리학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가 계속되면서 대상자들의 이력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그중 후보자가 교수나 학자 출신일 경우 으레 논문 표절 문제가 도마에 오르곤 한다. 얼마 전에는 학계의 모임 자리에서 어떤 분이 전화로 입각(入閣) 제의를 받는 바람에 모두들 흥미롭게 지켜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제의를 거절한 이유도 ‘표절 의혹을 받기 싫어서’였다. 모두들 훌륭한 분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다.

우리나라에서 연구윤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이는 잘 알다시피 ‘황우석 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연구윤리 분야에서 가장 앞섰다고 말하는 미국에서도 1980년대 말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구 부정행위 스캔들을 수 차례 겪은 후에야 비로소 연구윤리의 기준이 확립됐던 것을 보면, 이 역시 우리의 근대화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학자들에게 표절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 없다’고, 이제까지 써온 글을 모두 뒤져서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고 흠을 잡자면 안 잡힐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자기표절’까지 문제 삼으려 들면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자는 늘 자신이 중시하는 논지나 소신을 거듭해서 강조하게 마련이고, 이것을 ‘자기표절’이라 규정한다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똑같은 논문을 다른 곳에 다시 발표해 실적으로 삼는 ‘이중 게재’나, 상당한 분량의 글을 인용 표시 없이 다시 발표하는 일은 연구윤리 위반으로 지적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표절로 간주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계 교수들이 간혹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공계의 경우에 똑같은 실험 결과를 초점을 달리하는 논문에서 다시 활용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인문계의 경우에도 다른 취지의 논문에서 같은 논지를 반복해서 주장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표절이냐 아니냐에 대한 가장 정확한 판단은 결국 동료집단의 검증(peer review)에 의해 내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일부 언론 매체가 전문가 집단의 검증 절차 없이 자의적 기준에 의해 의혹을 제기하는 사례는 매우 유감스럽다. 이는 비단 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어떤 인물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검증이 ‘정확한 사실 확인, 전문가 집단의 의견, 교양인의 상식’에 의해 이뤄지지 못하고, ‘부정확한 사실, 자의적 기준에 의한 폭로, 대중 선동’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이는 당사자에 대한 인권 유린 및 폭행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나라를 이끌어갈 유능한 인재를 사장(死藏)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분이 ‘자기표절’로 상처받게 될 것을 꺼려 입각 제의를 거절하는 광경을 보면서 솔직히 나라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언론윤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절감하게 됐다. 우리는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이른바 ‘6하 원칙’(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에 대해서 배웠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이러한 상식만 가지고 있어도 언론 윤리가 따로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6하 원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보도, 그리고 마구잡이로 폭로만 할 뿐 부정확한 보도에 대해서 사후에 시인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일부 언론의 행태를 보면서 이제는 연구 윤리뿐만 아니라 언론 윤리도 강조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언론은 권력기관 중의 권력기관이 됐다. 주로 남을 감시만 할 뿐 자신은 감시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타락한다’는 말처럼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 무릇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더 힘이 있는 자에게는 그만큼 더 큰 책임과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이라면 비난받지 않을 만한 일에도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그가 단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의 최근 인물 검증 과정에서의 마녀사냥식 보도를 접하면서 언론윤리가 바로서기를 기원해 본다.

 

박찬구/서울대 교수·윤리학